새로운 이야기가 쓰이지 않는 이유는, 내 안에 쓰이기를 기다리는 해묵은 이야기들이 곯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열 살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학년의 끝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마지막인 만큼 친한 친구끼리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다시 배치하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우리 반은 네 개의 책상이 하나의 조를 이루는 배치였기 때문에, 각 학생이 종이에 자기와 가장 친한 네 명의 이름을 적으면 그것을 수합하여 모두가 좋아할 배치를 만들어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날 종이에 제 이름과 함께 네 명의 이름을 적어 선생님께 제출했습니다. 다음 날 선생님은 새로운 자리 배치를 발표하셨고, 저는 원하던 친구들과 같은 조가 되어 기뻤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저는 방과후 활동 때문에 늦게까지 학교에 있었습니다. 하교하기 전 사물함에 두고 온 물건이 떠올라 교실로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교실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불 꺼진 교실은 적막했고, 초저녁의 햇살만이 창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사물함에서 물건을 챙겨 교실을 나오려는데 선생님의 책상이 눈에 밟혔습니다. 불가침의 영역이었던 그 공간이 내 앞에서 무방비하게 있는 모습에서 저는 참을 수 없는 매혹을 느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자리에 앉아 보았습니다. 수납함의 서류철들을 손끝으로 어루만졌습니다. 선생님이 읽고 있는 책들을 펼쳐 보았습니다. 서랍을 열어 그 안의 형형색색의 펜들을 지긋이 바라보았습니다. 서랍 구석에 뒤집힌 종이 뭉치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종이의 크기로부터 저는 그것이 자리 배치 때 학생들이 제출했던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종이가 제법 두꺼운 탓에 다 모아두니 높이가 칠판 지우개 정도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들어 종이를 하나하나씩 천천히 넘겨 보았습니다.
제 이름을 적은 학우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자리를 원래 상태로 정돈하고 교실을 나섰습니다. 초저녁의 태양은 어느덧 노을이 되어 있었습니다. 날씨가 쌀쌀해 옷깃을 여몄습니다. 내가 타인에게 품는 마음과 타인이 나에게 품는 마음은 비대칭적이라는 사실. 모든 뒤집힌 것은 비수를 품고 있다는 사실. 외로운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노을을 바라본다는 사실. 너무나 자명하여 이제는 글로 적기도 민망한 사실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처음 깨치는 열 살의 인간에게는 어째서인지 눈물이 어릴 정도로 불가사의한 의문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니, 사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시 제 선생님은 수학을 좋아했으므로, 학생들의 종이를 받아 보고는 그것을 그래프로 나타내 보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의 공책 어딘가에는 스물여 개의 점들이 이루는 현란한 네트워크가 그려져 있을 것이고, 그 귀퉁이에는 네 개의 나가는 화살표만이 달린 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점을 응시하는 선생님의 시선을 상상해 봅니다. 그 시선을 상상하다 보면 저는 이내 수치심이 느껴져 종이에 네 명의 이름을 쓴 것을 후회합니다. 아무런 이름도 쓰지 않음으로써 도도히 홀로 존재하는 점이 되었다면 나았으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내 의문에 빠집니다. 네 개의 나가는 화살표만을 가지는 점과 아무런 화살표도 가지지 않는 점 중 무엇이 더 슬픈 점일까요. 모두에게 외면당한 삶과 모두를 외면한 삶 중 무엇이 더 비참한 삶일까요.
아직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타인에게 화살표를 건네는 일이 망설여집니다. 보답받지 못하는 심연으로의 낙하. 그것이 두려워 아직 당신에게 마음을 채 열지 못했다면 당신은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애달픈 마음에 저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제가 당신에게 올곧은 화살표를 뻗을 수 있는 날을. 낙하의 종착지에서 뼈가 으스러져도 좋다고 결심할 날을. 뒤집힌 종이들의 비수가 가슴에 꽂힌 채 당신 위로 자빠질 날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