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예쁘다”에 마음이 흔들렸던 그 순간부터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부터 시작될까.
어쩌면 아주 어릴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새 옷을 입었을 때,
“오늘 예쁘다.”라는 한마디를 듣고
괜히 어깨가 들썩였던 기억.
그 한마디는 단순히 칭찬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의식하며 자란다.
유아는 부모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배운다.
그 웃음에 반응이 돌아오면,
그 순간 세상은 안전하다고 배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아름다움 욕망의 출발점이다.
사춘기에 이르면 잣대가 바뀐다.
친구의 말 한마디,
SNS 속 인기 있는 얼굴형,
잡지 속 스타일이 새로운 기준이 된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소속되고 싶은 욕망이다.
‘예쁘다’는 말은 이제 사랑이 아니라 인정의 언어가 된다.
그 말 한마디에 기분이 오르고 내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성인이 되면, 그 욕망은 또다시 변한다.
직장에서는 단정함이, 사회에서는 세련됨이
‘신뢰감’으로 번역된다.
즉, 아름다움은 생존의 기술이 된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대하는 방식은
한때는 단순한 '꾸밈'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관계를 매끄럽게 만드는 '전략'이 되었다.
세상은 예쁘면 좋다 하면서도,
너무 예쁘면 불편하다고 속삭인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언제나 사랑과 불안을 함께 머금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욕망한다.
그건 단순히 타인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예뻐지고 싶은 마음이란
“나를 사랑받게 해주는 기술”일까,
아니면 “내가 나를 사랑하고 싶은 욕구”의 한 형태일까.
아직 그 답을 찾는 중이다.
그저 나는, 그 두 가지 마음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중이다.
분명한 건, 그 마음이 한때 나를 지치게 했지만
지금은 여전히 나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아름다움을 욕망한다는 건
‘완성된 나’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나’를 확인하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길 위에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그 욕망이 ‘나이’와 ‘관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따라가 보려 한다.
아름다움의 유통기한이라는 말,
정말 존재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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