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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이전의 아름다움 vs 결혼 이후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에도 ‘시기’가 있다는 믿음에 대하여

by 가온담


결혼 전엔,
예뻐지는 일이 ‘기회’를 만드는 일이라고 믿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닿는 자리,

관심이 오가는 순간마다

아름다움은 사회가 통용하는 기준 통화 같았다.

인정과 호감이 그 환율을 정했다.


좋은 옷, 좋은 향기, 좋은 말투.
그것들은 단지 ‘꾸밈’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방법이었다.


결혼 이후엔 조금 달라진다.
‘보여줄 사람’보다
‘함께 사는 사람’이 중심이 된다.
하지만 어느새 서로의 눈길이
익숙함 속에 묻혀버린다.


“이제 그런 거 안 해도 돼.”
“편하게 살아.”


그 말들은 다정함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음 한켠엔 미세한 거리감이 감돈다.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던 시간들이 사라지고,
서로의 빛이 조금씩 바래진다.


그래서 가끔은 거울 앞에서 멈춘다.

이건 누구를 위한 단장이었을까?
사랑받기 위한 의식이었나,
아니면 나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한 신호였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아름다움에도 시기가 있다.”

대체 그 시기는 누가 정하는 걸까.


젊을 때는 ‘유통기한’이 붙고,
나이를 먹으면 ‘노력의 흔적’이 따라붙는다.
그 사이의 공백에서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의심한다.


나는 그게 너무 이상하다.
왜 인간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걸까.


이제 이렇게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나이를 따라 줄어드는 게 아니라,

제 빛깔을 바꿔가며 살아남는 감각이다.

결혼 전엔 가능성이었다면,

결혼 후엔 온기다.


한때는 설렘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평온이 자리를 잡는다.


아름다움은 나이와 함께 옮겨 다닌다.
쇠퇴가 아니라 이동,
잊힘이 아니라 변주.


빛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비껴가듯
보여주는 모양은 달라져도,
그 안의 온도는 여전히 남는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균형을 배우는 중이다.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다’와
‘그래도 아름답고 싶다’ 사이에서
조용히 줄을 타듯 걷고 있다.


아마,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야
그 줄의 이름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연재 시리즈〈아름다움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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