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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un 10. 2022

걷기를 좋아했던 사람, 이제는 과거형

늙어감에 대하여

  나는 내가 끝없이 걸을 줄 알았다. 걷기는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자 좋아하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걸었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울적하면 밖으로 나가 공원을 열 바퀴 돌거나 밤의 천변을 빠르게 걷거나 대로변을 따라 주머니에 손을 넣고 하염없이 걸었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걷고 나면 다리가 무거워지고 땀이 나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다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버스 네다섯 정거장 정도는 당연히 걸어서 가는 거고, 여행을 가도 운전보다는 대중교통으로, 걷고 또 걷고 온종일 걷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올레길, 해파랑길, 둘레길 그런 길들도 걸어보았다. 언젠가는 잉카 트레일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봐야지 막연하게 결심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발목을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발목을 삐끗한 건가, 인대가 늘어났나, 병원에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잠시 후 또 괜찮아졌다. 잠시 근육이 꼬이기라도 한 건가 넘어갔다. 그런데 또 몇 달 후 엄지 발가락 옆이 아팠다. 무지외반증 그런 건가. 눈으로 보기에도 뼈가 휘어져 보였다. 이제 가죽구두는 그만 신어야겠다. 말랑말랑한 스니커즈나 발볼이 넓은 운동화로 바꾸어 신었다. 샌들도 스트랩의 위치를 면밀하게 따져 발가락 옆 튀어나온 부분을 절묘하게 비껴가는 것으로 골라야만 했다. 어느 날엔가는 발바닥이 아팠다.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고 쓰리고 내가 벌떼라도 밟은 건가 의아했다. 검색창에 이것저것 넣어보고 찾아보니 아무래도 족저근막염인 것 같았다. 어떤 밤에는 엄지발가락이 쏘인 듯 따가워서 잠에서 깨기도 했다. 벌겋게 부어서 뜨끈뜨끈했다. 이건 또 뭔가, 역시 열심히 검색해보니 통풍일 수도 있다고 했다. 아, 가지가지 하는구나. 

  그 증상들에 일관성이 있거나 지속성이 있었으면 병원을 갔을 거다. 근데 그 정도는 또 아니었다. 아팠지만 얼마 후 괜찮아졌고 한 번만 또 그러면 병원에 가야지 결심하고 나니 병들이 숨어버리기라도 한 듯 한참 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래서 두더지 게임처럼 불쑥 나타나는 통증을 잠시 견디고, 기다리고, 또 견디고 기다리고를 반복했다. 

  결국 갖가지 증상들은 발목 통증으로 수렴되었다. 다른 자잘한 것들을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발목 통증의 빈도와 정도가 높아졌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칼로 찌르는 듯 아팠다. 어쩔 수 없이 절뚝거릴 수밖에 없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도, 지하철을 타려고 뛰어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아픈 쪽 발을 끌 듯이 당기며 걸어야 했다.

  병원에 갔더니 퇴행성 관절염이라고 했다. 십수 년 전에 발목을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15 조각이 나서 철판을 대고 핀을 열 몇 개 박았었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고 나았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일에는 후유증이 있기 마련인가 보았다. 발목의 연골이 거의 닳아서 뼈끼리 부딪치기 때문에 통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죠? 내 질문에 의사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어차피 더 나이 드시면 인공관절 넣으시면 되구요, 지금은 근육을 좀 기르세요. 발목 근육이 생기면 어느 정도 연골을 보호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럼 많이 걸어야 하나요? 나는 당연히 그렇겠지, 라는 마음으로 물었는데 의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걷기는 체중이 실리기 때문에 권장하지 않구요, 실내 자전거나 고무 밴드를 발목에 걸고 하는 운동 하세요. 걷는 건 아무래도 좋지 않죠. 걸을 수 없다니, 걷는 게 통증을 더 악화시키고 연골을 닳게 한다니, 나는 당황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걷기가 좋지 않다니, 걷기가 좋지 않다니! 

나는 내가 평생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떤 순간에도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이 다가올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걷는 것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끝없이 걸으리라,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세상의 끝까지라도 하염없이 걸으리라. 걷고 또 걷고 걸으면 어떻게든 나는 살아 있고 살아나가리라, 그게 유일한 방법이고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걸을 수 없다면, 티베트 하늘호수를 오체투지로 돌고 또 돌면서 버텨보려 했는데 그럴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빼앗겨버린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혹은 젊었을 때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앞으로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나이 들어갈수록 가능성은 더 커지고 길은 더 넓어지고 선택은 더 여유로워질 줄 알았다. 넓어지다가 다시 좁아질 줄은 몰랐다. 그러다 결국 옴짝달싹 못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걷다가 걷다가 더 멀리, 더 오래, 더 큰 보폭으로 걸을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걸음이 느려지고 종아리가 천근만근 무거워 나날이 더 조금씩, 더 느리게, 더 숨차게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이제 그 전환점에 서 있다는 것도, 비로소 깨달았다. 결국 어느 순간에는 집 앞 수퍼에 나가는 것도 큰 모험인 것처럼 지팡이를 짚고 혹은 유모차를 밀면서 천천히 천천히 움직여야 하겠지. 무 한 개나 우유 한 병을 들고 오는 것도 버거워지겠지. 공간은 천천히 닫히고 좁아지고 결국 내 집, 내 방, 내 침대에 앉아 tv 화면을 보며 저기가 티베트의 카일라스로구나, 저기가 사하라 사막이로구나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올 거다. 그 사실이 뼈아프게 느껴졌고 한 번도 이런 가능성조차 생각해보지 못했던 젊음의 오만함 혹은 무심함이 원망스러웠다. 발목의 통증으로 인해 비로소 내 세계가 닫혀가고 좁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게 서글펐다. 

  걷지 못하면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나의 유일한 해결책, 유일한 버팀목은 그저 걷는 거였는데. 가만히 침대에 누워 할 수 있는 해결책이 무얼까. 그런 게 있기나 할까.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tv를 보실까. 마음속 허공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을 텐데, 나는 그것으로부터 걸어서 혹은 뛰어서 도망칠 계획이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다면, 그 허공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얻을 교훈은 무얼까. 나는 젊은이들에게, 청춘들에게 그냥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영원히 걸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게 다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그건 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 없이 걸어두도록 해, 라고도 천천히 아껴서 걸어, 라고도 하지 않는다. 나는 모른다. 그냥 나는 슬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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