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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un 16. 2022

덩굴장미가 피면 떠오르는: 여고생H

마음에 남은 - 사람들

  H 얘기를 해야겠다. 여고생이었지만 여고생이라는 단어와 가장 멀어 보였던 아이. 커트 머리에 안경을 쓰고, 치마를 단 한 번도 입지 않고(아마도 치마라는 게 없었을 거다), 성룡과 이소룡을 좋아해서 쿵푸를 배우려 하고, 아파트 비상계단에 신문지를 구겨넣은 세트장을 만들어 사진을 찍고, 스쿠터를 타고 엄마 심부름으로 두부를 사러 가는데 뒤에서 버스가 비키라며 빵빵거렸다는 얘기를 신나게 떠들어대던.


   생일파티에도 초대받은 적이 있다. 초등학생처럼 도화지를 자르고, 색연필로 그림을 그린 초대장. 식순도 있었다. 뮤직비디오 감상, 만찬, 가족앨범 감상 뭐 그런 순서였던가. 만찬은 과자와 오렌지 쥬스와 미니 돈까스였던 것 같다. 잘못해서 돈까스 한쪽 면이 진한 갈색으로 타버렸지만 케찹과 마요네즈를 뿌려서 장식을 했다. 그렇게 정성껏 준비하고 또 재미있었던 초대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날이 더워지고 덩굴장미가 피면 그애 생각이 난다. 언제나 웃고, 낙천적이며, 이런 저런 일을 벌이고, 세상 근심이라곤 없어 보였고. 극도의 비관과 걱정과 근심과 적대감으로 똘똘 뭉친 나와는 정반대였지만 무심한 듯, 나의 어떤 면도 개의치 않았다.


   내 생일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갈 때 그 애가 버스정류장에서 장미 한 다발을 건넸다. 오후였던 만큼 신문지에 싼 붉은 장미는 시들어서 꽃잎이 떨어지고 줄기가 축축 늘어졌다. 그 꽃다발을 만들기 위해 새벽부터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몰래 장미를 꺾었다고 했다. 경비아저씨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해 하며 여기저기서 한 송이씩 모아 겨우 완성한 꽃다발이라며 활짝 웃었다. 그렇게 정성껏 준비하고 또 아름다웠던 꽃다발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받아보지 못했다. 


   여름날 울타리에 피어 있는 덩굴장미를 보면 그 애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직전까지 어떤 마음, 어떤 상황이었든, 그 순간 다 괜찮아진다. 그 애는 알까. 어쩌면 기억도 나지 않을 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되었다는 걸. 장미를 볼 때마다 고맙고 그립다. 어디에서나 그 아이가 여전히 신나게 웃고, 일을 벌이고, 낄낄대며 좋아하기를. 내 마음의 빚과 고마움도 갚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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