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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un 23. 2022

쿠바: 물건의 수명

마음에 남은 - 장소들

  유행이 지난 옷가지, 안쪽에 커피색이 물들어버린 머그, 색 바랜 플라스틱 그릇, 뚜껑이 건들거리는 냄비 따위를 버리고 오는 길이면 쿠바 생각이 난다. 내 손에 있다가 이제 막 일반 쓰레기통이나 재활용함에 던져진 이 물건들이 쿠바에서 태어났더라면 적어도 십 년은 더 살았을 텐데, 그리고 쿠바 사람들이 들고 가던 구멍 난 바구니, 너덜너덜한 티셔츠, 이 빠진 커피잔을 떠올린다.


  미국의 오랜 경제 제재와 봉쇄로 인해 쿠바의 물자 수급은 쉽지 않다고 했다. 수입도 여의치 않고 직접 만들고 싶어도 원료 자체를 구할 수 없으니 방법은 자급자족 혹은 오래오래 활용하기. 그래서인지 우리였으면 한번 쓰고 버렸을 온갖 물건들이 쿠바에서는 수십 년간 사용된다. 손잡이가 떨어져 나간 플라스틱 통, 뚜껑 없는 유리병, 바스러진 코르크 마개, 날이 닳아버린 나이프,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 녹슨 철판도 여전히 살아있다. 물건의 입장에서 보면 쿠바는 영생의 땅이다. 어떤 것도 폐기처분 받아 버려지지 않고 모두 다 그 용도가 다할 때까지 살다가 자연사할 수 있다. 


  아바나의 향수 가게에 갔더니 큰 테이블에 원래는 다른 무언가가 담겨 있었을 각양각색의 병들이 깨끗하게 세척되어 놓여 있었다. 손님이 향을 고르면 몇 리터는 될 법한 큰 병에서 향수를 따라 그 작은 병에 담고 코르크 마개를 닫은 후 촛농으로 밀봉해주는 방식이었다. 인공향이 아닌 100% 천연 재료라고 했다. 인공향도 안 넣은 게 아니라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선물용으로 작은 병 두 개를 골랐다. 똑같은 병으로 고르고 싶었지만 똑같은 병 두 개가 없었다. 같은 가격이지만 병의 크기나 모양은 다 달랐고 고르기 나름이었다. 그렇게 산 향수는 여행가방에 넣고 다니는 동안 조금씩 새어나왔고, 모든 옷과 칫솔, 치약, 슬리퍼 따위에서 향수 냄새가 진동했다. 코르크는 조금씩 바스러졌고 하얀 밀랍 가루가 떨어져 플랑크톤처럼 향수 속을 떠다녔다. 한국까지는 갖고 왔으나 결국 선물이라기에는 민망한 물건이 되고 말았다. 


  쿠바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한국에 오는 순간 낡고 초라해졌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코르크 마그넷은 돌아와서 살펴보니 귀퉁이가 바스라져 있었고, 올드카가 그려진 철제 마그넷은 뒷면이 녹슬어 있었다. 노인과 바다 엽서 두 장은 종이 재질도 달랐고 모서리도 매끈하지 않았다. 연필 자국도 흐리게 번져 있었다. 인쇄된 그림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하루 종일 똑같은 배와 청새치와 파도를 연필로 쉼 없이 그렸을 것이다. 쿠바의 물건들은 그 물건을 스쳐 간 사람을 짐작해보게 되고 그 물건이 거쳐왔을 시간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페트병과 스티로폼과 낡은 슬리퍼를 버리며 생각한다. 이 물건들이 쿠바에서 태어났거나 쿠바로 입양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더 귀하게 더 오래오래 함께했을 텐데. 하나뿐인 물건으로, 귀하고 꼭 필요한 물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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