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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셋넷 May 07. 2022

부정적인 정신과 의사가 희망을 말하는 법

비관론자는 타인을 위로할 수 있을까

나는 매사에 부정적이다. 언제나 내가 가진 장점보다 단점에 집중했고 이미 얻은 것보다 앞으로 잃을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비관적인 나의 성향은 삶을 무리 없이 지탱해주었고 어느 순간에는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에는 일견 부당해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우울증의 핵심 증상은 희망을 보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우울증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는 어찌 되었건 희망을 말해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희망이나 낙관과 같은 단어에 어색해서 희망적인 말을 하는 것이 도무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간신히 뱉어내는 어색한 위로의 말에 환자들이 호응하는 것을 간혹 보았는데, 그럴 때면 뿌듯함보다 의아함이 앞서곤 했다. 


어찌 되었건 정신과 의사로 먹고살기 위해서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했고,  최소한 나에게 오는 환자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 의아함의 답을 찾아야 했다. 아직도 고민하며 답을 찾아가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문득 떠오르는 아래와 같은 문장들은 약간의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낙관론자의 비관과 비관론자의 희망은 들어볼 가치가 있다.'


자신의 가치관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면 그만큼 고심했을 것이고,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대한 자신의 생각에 어울리고 익숙한 결과를 찾기 위해 온갖 반론들과 대안적 가능성을 스스로에게 제시했음에도 나온 결과일 테니까. 설령 잘못된 결론이었다고 해도, 예컨대 비관론에 사로잡혀있는 정신과 의사가 고심 끝에 내린 긍정적 조언조차 틀렸더라도 어떤 노력과 고뇌가 들어있기에 상담에서는 치료적일 수 있다. 누군가 내 말을 듣고 희망을 찾기 위해 같이 노력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을 주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 같은 사람도 정신과 의사를 할 수 있겠다는 조금의 안도감이 생긴다. 결국에는 희망을 말해야 하는 직업이기에 역설적으로 비관론자인 나에게 기회가 생겼다. 나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희망이라는 단어의 근거를 찾기 위해 갖은 노력해야 했고, 노력이 가상해서인지 그렇게 나온 몇 가지 생각들은 그래도 환자들이 들어주었다. 그럴 때면 되려 내가 감사하기도 했다. 


예컨대 나는 자신이 실패했다고 호소하는 환자에게 성공할 것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대신 실패하되 덜 아프게 실패할 방법을 찾아보자 말한다. 자신의 삶이 불행의 한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행복해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도 불행할 수 있겠으나 정확하게 필요한 만큼만 불행해지자 말한다. 차마 부정적인 술어를 희망의 언어로 바꾸지 못하고, 동일한 술어에 부사만 바꾼 말들을 간신히 되돌려주는 셈이다.


태생이 긍정적이지 못한 내가   있는 말들은 겨우  정도이다. 하지만 나에게 오는 환자들은 겨우 살아가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기에 나의 이런 태도가   위로가 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말들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선택하도록 도울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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