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게으름을 한탄하며 진료실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과제를 미루는 학생, 매일 지각하는 직장인, 간단한 집안일조차 하기 버거워하는 주부 등 게으름은 나이와 직업과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정신과적 진단
진료실에 올 정도라면 이들이 말하는 게으름은 정신과적 진단을 내려야하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이 대표적인데, 우울증에 빠지면 의욕이 저하되고 기력이 쇠하여 당장에 주어진 일을 하기 쉽지 않다. 불안장애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실수하면 어쩌지 같은 결과와 평가에 대한 불안감이 심해 정작 일 자체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또 다른 흔한 원인으로 ADHD가 있다. ADHD가 있으면 만족 지연이 어려워 빠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지루한 일을 할 때 의욕이 떨어지게 된다. 강박증, 혹은 완벽주의 역시 고려해야 하는데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일을 시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공유하는 감정
원인은 다르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감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죄책감이다. 과제를 미루고, 자주 지각하는 행동에 게으름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도덕 혹은 죄악의 문제가 된다. 게으르다는 것은 방법을 알고 있으며 능력이 있음에도 나의 부덕으로 인해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면 문제 해결이 어려워진다. 죄악의 문제는 내 선택의 문제이지만, 적어도 정신과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자신이 원하여 일을 미루고 지각을 하지는 않는다. 게으름이라는 도덕적 용어의 사용은 잘못된 진단과 함께 의지로 극복하라는 잘못된 처방을 초래한다.
죄책감의 해악
단지 과제를 미루고 자주 지각하는 상황에서 생각을 멈추었다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진료실에 올 정도로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에 게으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억지로 의지를 발휘해보려다 실패하는 상황이 반복하면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덧씌워진다. 죄책감은 자존감 및 자기효능감의 저하를 초래하며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나 자신감을 떨어뜨린다. 결과적으로 바꾸고 싶었던 행동은 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악순환에 빠져버린 것이다.
중립적 단어의 필요성
효과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확한 현실인식이 필요하다. 게으름이라는 단어는 이미 도덕적 개념이 짙게 배어 있어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게으름은 좀 더 가치중립적인, 그래서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는 단어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심리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 '지연행동(procrastination)'은 여기에 알맞다. 이 단어에는 어떠한 가치판단도 들어가 있지 않으며 단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다는 객관적 묘사를 하고 있을 뿐이다.
게으름이 아닌 지연행동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우울, 불안, 강박, 집중력 저하 등 다양한 문제을 발견하고 개선 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게으름과 의지라는 관점에서는 생각할 수 없던 일이다. 게으름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게으름이라는 단어에서 벗어나야한다.
비도덕주의자 되기
의지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던 행동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편하지만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개인 간의 사회적 문제에서는 도덕이 필요할지 모르나 개인 내적인 심리적 문제에서 도덕은 효용성이 크게 떨어진다. 그런 문제들, 적어도 게으름과 같이 남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도덕의 짐을 덜고 가벼워져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비도덕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