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너 다이어리 8일차
새벽 5시, 어둠이 아직 세상을 감싸고 있을 때 알람으로 울리는 진동소리에 눈을 뜬다. 아내와 아기가 깰까 잽싸게 스마트폰을 낚아 채지만 몸이 무겁다.
침대에 달라붙어 있으려는 몸을 뜯어내기 위해 눈을 감은 채로 양치를 하고 아무 옷이나 주워입고 일단 밖으로 나서 뛴다. 세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혼자만이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계속해서 머리에 멤도는 업무 메일, 귀가에 조잘되는 가족일들에서 떠나 내 마음대로 생각해도 되는 도로와 나 만의 시간이다. 가끔은 골프연습을 곁들이는데 도통 늘지 않는 실력에 비참한 기분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골프를 치지 않는다고 약속해준다면 골프를 치고 싶지 않다. 주말마다 빼곡히 잡혀 있는 라운딩을 무사히 넘기기 위한 발악이다.
출근길, 광화문역에서 멈춘 지하철에서 물결처럼 쏟아져 나오는 직장인들. 그들의 고개 숙인 뒷통수에서 '헬조선'의 그림자를 본다. 반쯤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각자의 외로운 섬에 갇혀 같은 방향으로 어쩔 수 없이 쓸려가고 있는 것 같다.
아침 8시 30분, 뉴스 클리핑 메일부터 회사 메일함은 폭주하기 시작한다. 재판, 문건 리뷰, 고객 응대 그리고 그놈의 회의, 회의, 회의... 그 사이사이 놓치지 말아야 할 기한들, 잊지 말아야 할 약속들, 전화통화에서 잊지 말하야 할 내용들을 부여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메모를 해댄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이제 별로 배고프지도 않다. 저녁 약속이 있으면 점심은 건너뛴다. 하루종일 해를 쳐다볼일도 없을만큼 걷지도 않는데, 두끼를 다 먹었다가는 정장바지가 내 허리를 견디기 어렵다. 점심을 건너뛰고 뭐라도 해놓으면 오후가 한결 더 편하다. 12시30분이 넘어가면 살짝 두통이 오지만 무시한다. 회사에서는 점심 사오는 시간도 아끼라는 듯이 카페테리아에 샌드위치를 쌓아두었다며 메일을 보내지만 간단하게 무시한다.
해가 지고 나서는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어떻게든 일주일에 세 차례로 줄여보려하지만 그 틈새를 노리고 한두개의 술자리가 따라 붙어 결국 이번주도 나흘 연짱 술자리다. 선배의 부름, 후배를 챙기는 자리, 고객과의 만남... 여명과 상쾌환은 이미 내 의자 뒤에 박스채로 주문되어 있다. 여명 두 캔과 상쾌한 두 팩을 짜먹고 오늘만은 맨정신으로 귀가하겠다고 다짐한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길에 내일 아침 일정이 비교적 한산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내 다짐은 어김없이 실패하고, 어느새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또다시 5시 알람이 울린다. 술기운에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밤사이 온 이메일들, 결제 문자를 확인하면서 어제 귀가시간을 가늠하낟.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몸과 정신이 지쳐있다.
이 따위 하루들이 언제 그렇게 모였는지 벌써 올해도 분명한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선선한 바람은 끝없는 송년회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여러 모임에서 경쟁하듯이 송년회 날짜를 선점하여 8월에 이미 몇몇 송년회식이 잡혔다.
문건에 2024년을 쓰는게 어색했던 새해가 불과 사나흘 전 같은데, 이 한해도 단호하게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변호사로서 일년차가 더 쌓였지만, 서른 즈음부터 나이를 세는 일을 그만둔 것처럼 이제 누구도 내 연차를 무물어보지 않는다. 새해에도 누군가는 승진하고, 유학가고, 또 누군가는 사무실을 떠날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저 알람소리와 함께 내 몸통으로 내던져진 하루를 버텨낸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 같은 한해였다. '과연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더 나은 변호사,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걸까'라는 물음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내년 연말에도 그러리라는 것을 알기에 죄책감을 갖는 것은 그만둔다. 세월에 미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