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장 공장장

파트너 다이어리 10일차

by 이너픠스


서면 공장은 오늘도 돌아간다. 준비서면, 고소장, 내용증명 뭐든 발주받은 대로 기한 내 납품하기 위해 밤낮이 없다.


쓸 것과 봐야할 것은 태산같은데, 백지를 마주한 막막함은 정말 몸서리 친다. 그 시간이 퇴근시간을 한참 넘은 어둑한 밤이라면 그 막연함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그렇다고 남이 써온 서면을 고치고 다듬는 일이 쉽냐하면 그렇지 않다. 못 미덥거나 새로 입사한 변호사들이 보내 온 서면은 간혹 열어보기가 겁날 때가 있다. 조금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생겼을 때 눈을 질끈 감는 마음으로 파일을 열고는 잽싸게 페이지 수부터 본다. 몇 문장 읽어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거나 차라리 파일을 덮어버린다.


기계들이 터질듯이 연기를 내뿜으며 돌아가는 공장에 가장 무서운 적은 이메일 알림이다. 새로운 사건이나 일을 맡기려는 메일이 도착하면, 그리고 그 일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면 잠시 의욕상실 상태가 되어 멍해진다. 함박눈이 내리는데 마당을 쓰는 기분이랄까. 될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이미 하던 서면 하나로도 벅찬데, 또 다른 사건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내려앉는다.


하루는 마감 기한이 다가오던 날이었다. 어쏘가 작성한 서면 초안이 도착했고, 나는 그걸 고치느라 바빴다. 각종 법조항과 판례를 참조하며 논리를 정리하는데, 갑자기 내 컴퓨터가 멈췄다. 저장하지 않은 마지막 수정을 놓치고, 화면은 하얗게 변했다. 몇 초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겨우 재부팅을 시도했지만, 복구된 건 초안의 일부뿐이었다. 술자리에서 무용담 같이 나누는 이런 사건을 마주하면 좀 더 면밀히 대비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다.



영화 인셉션에서 레오나르도가 경쟁회사 상속인의 마음에 들어가 깊은 금고 속에 팽이를 돌려놓고 빠져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 속에 의심의 씨앗을 심어두는 것이다. 변호사의 서면이 바로 그 팽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판사나 검사의 무의식 깊은 곳에 내가 심어야 할 것은 한 점의 의심이다.


의뢰인이 유죄라 생각하는 판사의 마음에, 검사의 완고한 잠재의식에 의심 한 점을 심기 위해 길디 긴 서면을 쓴다. 서면 속의 논리와 증거, 그 모든 것들은 그들의 마음속 깊은 금고를 열고, 내가 돌린 팽이가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가게 하는 데 있다. 만약 이 작업에 성공한다면, 그 작은 의심은 물을 먹고 자라나 결국 그들의 판단을 바꿀 것이다.


그러나 그 금고가 쉽게 열리지 않고, 팽이는 뜻대로 돌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하지만 이 서면 공장은 그런 실패에도 멈추지 않는다. 의뢰인이 눈을 부라리며 기계를 뚫어져러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안 될 줄을 알면서도 불안에 떠는 의뢰인을 다독여가며 서면을 고치고, 또다시 새로운 사건을 맡으며 의심의 씨앗을 심을 기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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