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베르시 (Conversi) - 새로운 신분의 수도자들

중세 수도원 이야기

by Roma Vianney

하느님을 찾는 사람으로서의 목적을 가지고 베네딕도 수도원이라는 공동체가 탄생을 하였지만 초기 500년 동안 유럽의 복음화라는 교회적 요구와 수도원 조직 안에서 정치를 하려고 했던 황제들이 사회적 요구로 인해 그들의 삶의 모습은 점점 복음이 결여되는 세속의 생활에 가까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맞서 수도원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11세기부터 등장한 개혁 수도회들은 기존에 있었던 베네딕도 수도회와는 다른 새로운 수도회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베네딕도의 규칙을 더욱 잘 따르며 하느님의 찾기 위해 새로운 규칙을 추가하거나 바꾼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바꾸려 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나타난 수도원을 정의하는 데 있어 개혁 수도회가 아니라 개혁 수도자라는 표현이 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 베네딕도 이후 초기에는 수도원 대부분의 구성원이 평신도였고 전례적, 영성적인 특별한 이유에서만 사제를 양성하거나 입회를 허가하였습니다. 모든 수도자들은 평등하게 육체적 노동을 하였고, 특별하게 일이 많아질 경우에만 외부에서 사람을 불러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9세기경부터 수도원 소유가 늘어나면서 삶이 풍요로워지기 시작하였고, 평수사보다는 사제수사의 수가 더 늘어나 선교나 전례적 일을 통한 육체적 노동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토지에 대한 관리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클루니 수도원이 등장하기 전까지 봉건제 시스템처럼 세속의 사람들에게 농사일을 시키게 되었고, 수도자들은 자기들에게 더 필요한 전례, 사목, 독서, 교육 등의 일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면서 수도원은 결국 세속의 일에 더욱더 열중하게 되고, 이것은 세속의 왕이나 영주들과 정치적인 관계를 맺는 일까지 벌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수도원 개혁이 있던 11세기부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수도원 안에서 찾으려고 하였는데, 바로 정식 수도자들이 아닌 평신도들이 수도원을 위해 봉사하는 새로운 직분의 도입이었습니다. 수도원의 이 새로운 신분은 11세기 개혁 수도회 안에 공통적으로 생기게 되는데 카말돌리회나 카르투시오회는 소수의 은수 수도자들이 중심이 되는 수도원 혹은 공동체 형태였기 때문에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시토회는 자급자족의 농장 형태가 생계의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수도 많았고 또한 많은 역할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시토회 안에 있었던 이 새로운 직분의 수도자들의 모습을 먼저 설명하는 것이 중세 개혁 수도회의 삶이나 수도원 건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1023년 성 로무알도가 세운 카말돌리 공동체에서는 은수 수도자를 보호하고 도와주기 위한 평신도들을 콘베르시(Conversi)라고 불렀습니다. 카르투시오회나 시토회에서도 이런 역할을 했던 평신도 형제나 평수사 또한 같은 명칭인 콘베르시라고 불렀습니다. 특히 시토회에서 이 콘베르시는 앞서 있었던 베네딕도 수도회들의 외부 사람들을 고용하면서 이익을 얻는 방식을 없앨 수 있는 좋은 방식이기는 하였습니다. 베네딕도의 규칙을 준수하며 육체적 노동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 시토회였기에 콘베르시라는 형제를 두면서 수도원의 땅에서 자신들이 흘린 땀으로 열매들을 걷어들인다는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콘베르시 형제에 관련된 규정은 12세기 중반부터 시토회 문서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콘베르시라는 말은 콘베르티르시 (convertirsi)라는 이태리 말에서 나온 말로 ‘회심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기존의 수도자와는 신분의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세상 삶에 경험이 있던 성인이 입회를 하였고 입회 조건도 정식 수도자라고 할 수 있는 기도 수사들보다 까다롭지도 않았습니다. 콘베르시가 되기 위해서는 1년의 지원기를 거쳐야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앞으로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을 배우며 그들에게 맞는 수도 생활을 익혔고 주의 기도, 신경, 자비송 등 몇 가지 중요 기도를 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보면 안 되었고 또 전문적인 공부를 해도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1년이 지나면 죽는 순간까지 장상에게 순종한다고 약속을 하면서 서원을 하게 됩니다. 이 자발적인 서원은 기도 수사가 되거나 사제 수사가 되지 않겠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수도복은 회심자라는 말에 적합한 진한 회색 혹은 노동 생활에 맞는 밤색으로 물들인 거친 천을 사용하였습니다.


20220116_101539754_iOS.jpg 카르투시오회의 노동하는 콘베르시 형제들 (출처 : youtube.com)

이들은 수도원 내에서 부엌일이나 세탁 일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수도원 소유의 농장이나 목장 그리고 양어장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수도원 내에 숙소가 있을 경우에는 기도 수사들과 비슷한 환경의 방을 사용했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건물은 수도원 삶의 중심인 사각 정원을 사용하지 않는 반대 방향에 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수도원 사각 정원을 기준으로 본다면 해가 지는 서쪽 편에 여러 농기구나 곡물을 모아두었던 창고 위층이 그들의 숙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일이나 대축일이 아닌 이상 공동 전례에 참석하지 않았고 대신에 자기가 일하는 장소에서 주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수도원에서 떨어져 있는 농장에서 일하는 콘베르시 형제는 주일이나 축일에만 수도원으로 돌아왔고, 평일에는 기도 수사처럼 홀로 지냈습니다. 성체를 영할 수 있는 것은 일 년에 일곱 번 허락이 되었고 나중에는 열두 번으로 늘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수장은 그들 중에 농장을 총 관리하던 사람이 맡아서 하였고 노동 중에 엄격한 침묵을 준수했지만 단식에 대한 의무는 기도 수사보다 덜 엄격했고 휴식 시간도 그들보다 길었습니다.


농장에서 일하는 콘베르시 (출처: abbaziamorimondo.it)

이렇게 각 장소에서 일하는 것 외에 수도원 내에서 건물을 짓거나 보수하는 일도 하였고, 얻은 수확물이 많을 때에는 밖에서 팔아 수도원에 필요한 것을 사 오는 일도 하였습니다. 노동 외에도 수도원 간의 전령으로 편지를 전달하기도 하였고, 수도원장의 공적인 업무 시에는 비서처럼 동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황청이 아비뇽에 있었을 때에는 교황청의 편지를 운송하는 일도 맡았었는데, 그들에 대한 신뢰도 있었지만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그들이 문맹자였기에 혹시 편지를 읽어도 편지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콘베르시 형제에 대한 제도는 시토회가 단 시간 내에 많은 농장과 수도원을 유럽에 퍼트리는데 크게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들의 수는 보통 기도 수사의 두 배 정도였고 어떤 수도원들은 세 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300년경 플랑드로 지방의 한 수도원은 180명의 기도 수사에 350명의 콘베르시 형제가 있었다고 하고, 12세기경 영국에는 대략 3,200명의 콘베르시 형제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콘베르시 형제들이 생겼던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선 그 당시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첫 번째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시토회가 설립되던 시기 서유럽은 봉건 제도가 무너져 가던 때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많은 농민들은 일할 곳을 잃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곳을 찾게 되면서 어떤 이들은 한창 유행 중이었던 십자군에 지원을 하기도 했고, 어떤 이들은 또 많은 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수도원으로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악덕 농장주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적어도 먹고살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생각하여 도망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고, 귀족들의 경우에는 죽으면서 유산을 수도회에 기증하면서 자기의 자식들을 받아줄 것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12세기 후반이 되면서 이러한 상황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188년 시토회는 새로운 회헌에 따라 귀족 집안의 자식이 수도원에 들어오면 더 이상 콘베르시가 될 수 없고 정식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수도자와 콘베르시 사이에 신분에 대한 차별이 가시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식 수도자들은 더 이상 많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였고, 세속 사람들이 볼 때 콘베르시는 사제 계급에도 수도자 계급에도 평신도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한 집단으로 보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인식 속에서 처음 이 직분이 수도원에 들어올 때 피하려고 했었던 생각들이 들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주인과 노예’라는 차별이었습니다. 사실 13세기에 들어가면서 노예라는 신분은 점점 사라져 갔고, 농민들도 자기 땅을 가진 자유농민들이 등장하여 가난이라는 것은 자기 노력에 따라 뛰어넘을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더 이상 시토 수도원에서 내 삶의 안정을 위해 찾아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종교적 삶에 자기의 가치를 두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형제적 사랑을 더욱 강조한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메니코 수도회의 등장도 콘베르시의 감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감소는 실질적으로 노동하는 사람의 감소로 이어졌고 수도원의 농장은 대여 형태로 사람들에게 빌려주게 되면서 수도원의 경제적 어려움과 규모의 축소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5세기가 되면 시토회 안에서 콘베르시 직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18세기에는 시토회 내부의 개혁 수도회라고 할 수 있는 엄률의 시토 수도원 (트라피스트 수도회)이 등장하면서 다시 그 직급의 형제가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이것은 6세기 때에 베네딕도 수도 규칙에 귀속하는 평신도 수도원 운동에 맞는 모습으로써, 사제는 더욱 육체적 노동에 참여를 하고 수도자 형제들은 책임성을 가지고 수도원 공동체에 참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수도원 헌장을 통해 모든 수도자들의 평등성과 권리를 재확인하였고 콘베르시라는 용어는 사라지고 형제 (fratelli) 혹은 수사라는 용어로 통일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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