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수도원 명칭인 까자마리 (Casamari)는 라틴어에 어원을 두고 있고 마리오의 집 (Casa Mario)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원래 이 장소는 기원전 1세기에 집정관을 지냈던 가이오 마리오 (Gaio Mario) 장군이 살았던 장소입니다. 하지만 수도자들이 오랜 기간 이곳에 살며 까자마리는 마리아가 이곳에 오실 것을 예견하여 붙여진 것처럼 마리아의 집 (Casa Maria)이라는 뜻으로 모두 알아듣고 있습니다.
수도원의 기원은 근처 베롤리 (Veroli)라는 마을에 있었던 몇몇의 성직자들이 이곳에 수도원 세우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1005년에 로마의 순교자 성 요한과 바오로에게 성당을 처음 봉헌하였고, 1036년에 베네딕도의 수도자들이 들어오면서 까자마리 수도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초기 베네딕도 수도원은 봉건 제도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는 장원 제도에 의해 수도원의 경제적 발전도 있었지만,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에 있었던 교황권과 세속권의 다툼으로 점차 베네딕도 수도원의 역할은 작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개혁 수도원인 시토회가 이탈리아에 퍼지면서 까자마리 수도원도 베네딕도의 규칙을 기반으로 한 더욱 엄격한 규칙 생활을 하는 시토 수도원으로 1140년도에 바뀌게 되었습니다. 12세기 말에 현재의 수도원이 시토회 정신과 수도 생활에 맞게 세워졌고, 1203년에는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축복과 함께 수도원 성당 건설이 시작되어 그다음 교황인 오노리오 3세 교황에 의해 1217년도에 승천하신 성모 마리아의 이름으로 축성되었습니다.
14세기 중반까지 수도원은 시토회 정신에 따라 육체적 노동, 단식, 기도, 침묵의 생활로 많은 수도자들 (기도 수사와 콘베르시)이 입회하여 큰 성장을 이루었지만, 1305년에서 1377년까지 있었던 교황청의 아비뇽 유폐 그리고 곧이어 있었던 세 명의 교황이 서로의 정통성을 내세워 싸웠던 서방교회의 분열까지 겪으면서 많은 피해와 수도원의 축소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마르티노 5세 교황 (재위 1417-1431) 이후로는 교회가 다시 한 명의 교황을 갖기 시작했지만, 귀족 집안에서 교황이 선출되는 족벌정치가 시작되면서 더욱 수도원은 자주성을 잃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기쯤에 콤멘다(Commenda)라는 제도가 역시 까자마리 수도원에도 들어오게 되는데, 교황청에서 직접 수도원을 관리하면서 교황이 지정한 추기경이 대리 수도원장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교황 집안에 속한 추기경이 맡았고 까자마리 수도원은 마르티노 5세 교황 조카였던 프로스페로 콜로나 추기경이 맡았습니다. 이들은 수도원의 유지와 발전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수도원의 운영을 통해 들어오는 돈에만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제도는 1850면 비오 9세 교황 이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이 대리 추기경 수도원장 제도의 반동 작용으로 수도원 제도의 발전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교황청의 직접 개입으로 수도원장의 자주권을 빼앗긴 각 개별 수도원들은 서로 도움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써 연합 수도원을 만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모(母) 수도원과 자(子) 수도원의 관계를 만들었고, 이것은 수도회라는 이름으로 되어 후에는 수도관구로 나뉘게 됩니다.
1717년 클레멘스 11세 교황은 당시 시토회 안에서 더욱 엄격하게 살기 위해 새롭게 탄생한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이 살도록 하면서 공동체 전체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으며 재탄생의 시기를 갖게 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이것도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799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정복으로 1811년부터 수도자들이 까자마리 수도원에서 3년 동안 쫓겨났고, 이탈리아 통일기에는 각 지역에서 온 군인들이 수도원을 점령하고 약탈하기까지 하였고 이탈리아 통일 이후에는 수도원 합병 과정에서 트라피스트 수도회가 들어오는 것이 거부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1929년 12월 14일에 반포된 비오 11세 교황의 Beati Petri Apostoli 교서에 의해 이 혼란한 시기에 이 수도원에 살던 다른 수도자들을 시토회에 합치면서 다시 원래의 12세기 때 수도원 이름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현재 이곳 까자마리 수도원에는 20명의 수도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로마 집정관 이름으로 붙여진 마리오의 길을 건너면 하나의 웅장한 아치로 된 정문을 만나게 됩니다. 수도원은 성벽처럼 사면의 벽으로 둘러쳐 있는데, 이것은 요한 묵시록 21장 9절부터 나오는 새 예루살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문 위 여덟 개의 창문을 가지고 있는 내부 공간은 15세기부터 시작된 교황이 파견한 대리 수도원장 추기경이 머물던 곳이었습니다. 대리 수도원장 추기경은 수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수도원 내부에서 함께 살지는 않았습니다.
정문을 들어가면 두 개의 아치 문이 나오는데, 작은 것은 사람이 다니던, 큰 것은 마차가 다니던 문이었습니다. 왼쪽에 계단으로 연결된 장소는 원래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이나 곡식을 수도원에서 나누어 주던 장소였습니다. 지금은 수도원에서 만든 제품이나 책을 파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 문지기실 2. 수도원 입구 3. 도서관
4. 축복의 성모님 5. 사각 정원으로 들어가는 계단
6. 사각 정원 (Chiostro)
7. 농장으로 나가는 통로 (Locutorium)
8. 규칙서의 방 9. 기도서 보관 장소 (Armarium)
10. 제의방 11. 성당 12. 수도자 공동묘지
13. 공동 식당 14. 기도 수도자 성당 출입구
15. 콘베르시 성당 출입구
16, 17. 박물관과 미술관 18. 약국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손님으로 왔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어느 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베네딕도 규칙서 53장
수도원 현관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는 방문객이나 순례자들을 처음으로 맞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라는 것이고, 또 다른 기능은 세상과 수도원을 분리하기도 하고 연결하는 소통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시토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하느님의 집’이라고 생각을 하여 봉쇄된 공간 안에서 공동체적 사랑과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며 살려고 하였습니다. 해서 이 현관에는 문지기실이 따로 있고 그 자격에 대해서도 베네딕도 규칙서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수도원 현관에는 말을 주고받을 줄 알고 또 인격이 성숙하여 함부로 나돌아 다니는 일 없이 현명하고 연로한 사람을 둘 것이다. 문지기는 정문 옆에 방을 가져, 방문자들이 언제나 응대할 사람을 찾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규칙서 66장)
현관 내부는 거친 자연돌을 움직이지 않도록 꽉 채워 벽과 천장을 덮어 만들어 엄격하면서도 단순함이 느껴지게 하였습니다. 왼쪽에는 문지기실이 있고 오른쪽 뾰족아치형으로 만들어진 문 쪽으로는 수도원 도서관이 있습니다.
현관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푸르른 정원이 나오고 마리아의 집이라는 것을 증명하 듯 푸르른 잔디밭 중앙에 1958년도에 피에트로 카노니카(Pietro Canonica)가 만든 청동 성모상이 방문객들을 먼저 맞이하면서 축복하고 있습니다. 정원을 마주 보고 기도 수사와 노동 수사들이 사용했던 건물의 일부를 볼 수 있고 왼쪽 계단 쪽으로 올라가면 수도원 건물의 중심인 사각 정원 (chiostro)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중앙 정원과 맞붙어 만들어진 사각 회랑은 수도원 각 건물과 연결된 장소의 중심이자 기준점이 되는 곳입니다. 이 사각 회랑을 따라 걷다 보면 성당, 기도서 보관소, 규칙서의 방, 수도승이 일하는 방들, 벽난로의 방, 식당, 창고 그리고 수도자의 침실 등 수도원의 각 장소를 다 만날 수 있습니다. 잠그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라틴말 클라우스트룸 (claustrum)에서 유래한 이탈리아 말 키오스트로 (chiostro)는 말 그대로 회랑 바깥쪽에 각 장소의 방을 두어 세상과의 연결을 막아주는 동시에 회랑 안쪽으로는 창문과 통로 그리고 우물을 두어 수도자의 삶의 중심이 어느 자리에 두어야 하는지를 건축학적으로 잘 보여주는 곳입니다.
이곳은 수도자들이 개인적으로는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공동체적으로는 성서와 영적 독서를 낮은 소리로 혹은 높은 소리로 읽어, 자신만이 아니라 공동체 형제들도 듣게 함으로써, 눈으로는 보지만 귀로는 듣게 하는 두 가지 육체의 감각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정원은 또한 공동체의 삶을 준비하고 소통하는 장소입니다. 대축일 장엄 전례를 위해 성당으로의 행렬을 준비하던 곳이고 서로의 머리와 수염을 잘라주면서 형제적 사랑을 서로 느끼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볼 수 있는 회랑 한편에 붙어 있는 조그만 종은 현대의 스피커나 핸드폰을 대신해 종소리 수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부를 때 사용하였습니다. 종 아래에는 약속한 내용이 적혀있네요 : 종소리 한 번은 식료품 담당하는 수도자, 두 번은 농기구 담당 수도자, 세 번은 불 담당 수도자, 네 번은 식당 담당 수도자, 다섯 번은 요리 담당 수도자, 여섯 번은 문지기, 한번 길고 다섯 번 짧게 치는 것은 간호 담당 수도자, 한번 길고 다섯 번 짧게 치고 다시 한번 길게는 약초 담당 수도자.
대부분의 수도원을 방문하면 수도원 정원은 사각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수도원 정원은 원형이나 팔각형 형태가 아닌 사각형으로 만들어졌을까요? 성당과 마찬가지로 수도원 정원도 하느님의 현존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고, 바로 숫자 4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회랑에 있는 창문에서도 나타나는데 정원과 접해 있는 회랑의 창문들도 각 면에 두 개의 기둥으로 받친 두 개의 창문이 하나로 된 큰 창문이 네 개씩 있습니다. 고대에 4라는 숫자는 네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땅, 우주의 네 가지 요소, 네 군데의 방향, 네 개의 바람, 사 계절 등 우주를 상징하는 숫자였습니다. 이 사각을 이루고 있는 네 개의 회랑은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향하는 영적인 순례자이자 사람인 수도자의 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나를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우주의 네 가지 요소인 땅, 물, 공기, 빛은 서로 혼합되어 생명을 탄생시키는 장소가 바로 이 정원의 가장 중앙에 있는 우물이 되는 것입니다.
우물은 수도자의 중심인 하느님의 현존을 여덟 개의 기둥과 팔각형의 모양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8이라는 숫자는 교부들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여덟 번째 날이고 하느님께서 세상을 7일 동안 창조하신 후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여덟 번째 날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8이란 숫자를 눕혔을 때 수학에서 표시하는 무한대가 눈에 들어오며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하느님의 영원함을 이야기합니다.
정원 남쪽면의 창문 주두를 보면 세 사람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222년 이곳에 머물렀던 페데리코 2세 황제를 기억시키고 있습니다. 이 얼굴들은 당시 시칠리아 왕국과 예루살렘 왕국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페데리코 2세, 그의 비서였던 베드로 (Pier delle Vigne) 그리고 수도원장이자 황제의 공문서 보관장이었던 요한 5세 (Giovanni V)입니다. 페데리코 2세 황제와 까자마리 수도원과의 관계는 다른 어떤 수도원보다도 특별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6세와 어머니 알타빌라의 코스탄자 때부터 황제의 보호와 통행료 면제, 대지의 기부 등을 약속 및 확인을 해주었고 그들의 아들이었던 페데리코 2세는 21세였던 1215년부터 시토회의 양자가 되어 수도자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222년 4월 24일 막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페데리코 2세는 까자마리 수도원에 머물게 되는데, 이때 기록된 내용 중에 "수도원의 영적 유산에 참여하고 양자가 되는 것을 겸손하게 청하고 얻었습니다."라고 쓰여있습니다.
현재 회랑의 천장은 당연히 원래의 것은 아닙니다. 계속 설명했지만 가난과 단순함을 강조했던 시토회에 색칠이나 회칠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붕은 원래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18세기 초에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초기 회랑의 지붕 형태는 포사노바 수도원의 아퀴노의 토마스 성인이 돌아가신 수도자들의 병실이 있는 작은 회랑에서 그 형태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지붕은 아치형이 아니라 벽에서 정원 쪽으로 대각선으로 내려오고 있고 정원을 향하는 아치의 창문은 로마네스크의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