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사노바 대수도원과 성전 기사 수도회 Ⅱ

중세 수도원 이야기

by Roma Vianney

전편에 이어서...


노동을 주로 하는 콘베르시 수도자의 성당 출입문은 기도 수도자들과는 따로 분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 위에서도 성전 기사회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포도나무가 부조되어 있는 까자마리 수도원의 콘베르시 수도자들의 성당 출입문과도 다른 모습입니다.


문 왼편 성당과 붙어있는 건물이 농작물이나 농기구를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그리고 그 위 2 층은 콘베르시들이 사용했던 수도원 독방입니다. 수도원의 삶의 중심인 사각 정원을 이들은 사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침실도 일하는 공간 위에 만들어졌고 식당도 기도 수도자들이 사용하는 공동 식당과는 분리된 장소를 사용하였습니다. 결국 사각 정원을 기준으로 기도 수도자들은 동쪽과 남쪽을 사용하였고 콘베르시는 사각 정원과 떨어진 서쪽 편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형제 (frate)라는 개념보다는 홀로 지내는 사람이라는 모나코 (monaco)라는 의미가 강했기 때문에 같은 수도원에 살더라도 서로의 역할에 따라 생활하는 환경도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사각 정원 안에 있는 규칙서의 방에 콘베르시는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규칙서의 방
솔로몬의 매듭

수도원 사각 정원 동쪽 방향 쪽에 있는 규칙서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오른쪽 벽에 ‘솔로몬의 매듭’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 자리를 사용하였기에 이 솔로몬의 매듭 역시 성전 기사회를 나타내는 표시였고 정십자가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개의 매듭이 교차하면서 역시 8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보여주고 끊어지지 않는 선의 연결에서 하느님의 영원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솔로몬의 매듭은 규칙서의 방뿐만 아니라 수도원에 있는 유일한 십자가이자 장식이었습니다.


포사노바 수도원 평면도와 예상 장소들을 보여드리는 아래 평면도에는 수도원에서 볼 수 있는 장소도 있고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는 장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양어장, 인공 수로, 작업장 같은 건물 등은 예상 장소들입니다.

포사노바.jpg

1. 수도원 성당 2. 사각 정원 3. 제의방 4. 규칙의 방 5. 농장 가는 길 6. Autitorio del priore 7. 지원자 회의방 정원 동쪽의 2층은 기도 수도승 방 8. 벽난로 방 9. 기도 수도자 회의방 10. 기도 수도자 식당 11. 부엌 12. 노동 수도자 통로 13. 공동묘지 14. 방앗간 15. 가난한 순례자 침실 16. 가난한 순례자 소성당 17. 작업장 18. 작업장 19. 부수적 수도원 입구 20. 작업장 21. 기도 수도자 병실 및 포레스테리아 22. 노동 수도자 병실 23. 박물관 24. 수도원 주 입구 25. 수도원 둘러싼 벽 26. 아마세노 강에서 끌어들인 인공수로 27. 양어장으로 추정 28. 노동 수도자 침실 층



이곳 포사노바 수도원에는 까자마리 수도원에서는 볼 수 없는 장소가 있습니다. 사각 정원 남쪽 부분에 있는 기도 수도자의 식당 앞에 있는 손을 닦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사방이 둥근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이 손 씻는 장소는 고대 로마 시절에 사용하였던 여러 기둥들을 가져와 사용하였기에, 특히 굵은 세 개의 기둥은 모양이 서로 다른 대리석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중앙에 손을 닦을 수 있는 우물 혹은 세면대가 있던 장소였지만 지금은 성년(1)이었던 1600년에 이곳 교황 대리 수도원장이었던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이 봉헌한 대리석 식탁이 놓여 있습니다.


20200828_093736511_iOS.jpg


식당을 들어가기 전에 손을 닦는다는 것은 위생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공동체가 함께하는 이 장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둘이나 셋이 모이는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 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마치 성당에 들어갈 때 성수를 찍어 십자 성호를 긋고 들어가는 것처럼 내 손을 씻는 행위는 마음까지 정화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 수도자의 공동 식당

기도 수도자의 식당은 사각 회랑 남쪽에 만들어 하루에 가장 빛이 많이 들어오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뾰족아치 형태로 솟은 천장은 하늘로 향하는 거룩함을 보여주고 있고, 커다란 남쪽 창문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은 주님의 주시는 사랑의 온기를 온전하게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기둥을 세우지 않고 장방형으로 된 넓은 공간을 확보하는 이 식당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함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하였고, 이것은 서로에 대한 형제애를 나누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콘베르시들은 이곳에서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고 그들만의 식당이 창고 옆에 따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두 식당 사이에 요리할 수 있는 부엌을 두어 식사에 대한 차별은 두지 않았습니다.


20200828_093536294_iOS.jpg 공동식당 독서대

정면 오른편에는 식당 바닥보다 높은 곳에 만들어진 뿔삐또 (pulpito)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당의 독서대와 같은 것으로 식사 중에 한 수도자가 복음이나 교부들의 이야기를 이 위에서 읽어 주어 육신을 채우는 음식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을 동시에 채워주도록 해주는 곳입니다.


이 공동식당은 1208년에 완성이 되었기 때문에 수도원 성당이 완성되어 축성하러 온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수도자들과 분명히 이곳에서 식사를 하였을 것입니다. 이 교황은 그다음 해인 1209년과 10년 사이에 프란치스코에게 로마 라테란 성전에서 새로운 수도회 인준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회의 등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시토회가 감소되는 요인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하나의 사각 정원

식당을 나와 오른쪽 회랑 끝으로 가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지상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신 장소로 나가는 조그만 문이 나옵니다. 이 문은 수도자들이 수도원 밖의 농장을 가기 위해 드나들었던 문이었고 이 문 앞 회랑에서 수도자들은 수도원장에게 하루 일과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사진 속의 회랑의 창문들이 다른 형태인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왼편은 시토회로 바뀌기 전 베네딕도 수도자들이 10세기경에 만든 것이고 오른편은 시토회에서 세면대를 만들면서 다시 만든 12세기 때의 것입니다.


20200828_094533536_iOS.jpg
20200828_091704638_iOS.jpg
사각 정원에서 들어가는 성당 문과 기도 수도자 침실에서 들어가는 성당 문 (계단 옆에 있는 문은 제의방)

기도 수도자들만 성당을 출입할 때 사용하는 두 개의 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낮에 일과 중에 기도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각 정원과 연결되어 있는 문이고, 다른 하나는 밤에 수도자 침실에서 직접 성당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콘베르시와는 다르게 기도 수도자들은 기도하는 횟수가 더 많았습니다. 특히 자정이 지나면서 드리는 밤기도가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2층 침실에서 직접 성당으로 들어오는 문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당 내부의 기도 수도자의 좌석과 콘베르시의 좌석은 성당 중앙 부분에 칸막이를 만들어 분리를 하였습니다. 기도 수도자들은 제대가 있는 앞부분을 콘베르시는 중앙 문과 가까운 쪽을 사용하였습니다.


반대편 쪽 성당 날개 회랑에도 문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의 문이라고 부른 이것은 수도자들의 장례 미사 후에 그들의 시신이 나가던 문이었고 문밖에는 수도자들의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수도원의 문은 하나하나 각 수도자들의 용도에 맞게 만들어졌고 전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티모 수도원에 있었던 세례의 문은 이곳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안티모 수도원 성당은 순례자들과 신자들이 함께 사용한 성당이었다면 이 성당은 오직 수도자들만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세례 받을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례적으로 중요한 세례반이나 세례의 문은 시토회 수도원에서 볼 수 없습니다.




성전 기사회는 십자군 전쟁의 시작과 함께 탄생을 하였고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함께 사라진 중세의 불운한 수도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1차 십자군 전쟁 후 이슬람의 적지 한가운데서 그들에게 포위된 형국으로 수십 년을 유럽에서 오는 보충병도 없이 제한된 십자군으로 예루살렘을 지키고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십자군들에게 목숨을 바쳐 평생을 예루살렘을 지키겠다고 나선 성전 기사회는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군대이자 상비군이었을 것입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의 이론적인 지원과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의 수도회 인준으로 성전 기사회 지원자들은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예루살렘까지 가지 못하던 신자나 귀족들은 돈이나, 토지 등을 기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성지를 잃으면서 쫓겨난 이들에게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예수님의 무덤 성당을 지킨다는 목적은 함께 사라져 버렸고 더 이상 수도회 존립의 이유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이들이 기증받아 유럽에 갖고 있었던 돈이나 땅들은 이들을 도와주는 목적으로 쓰이기보다는 오히려 해체화를 가속화시켰습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나면서 교황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고 심지어 프랑스 추기경이 교황이 되어 교황청이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겨지는 사건도 벌어지게 됩니다. 이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이익을 본 나라는 바로 프랑스였습니다. 이들은 성전 기사회가 가지고 있던 재산을 프랑스 국왕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성전 기사회에 대한 나쁜 소문도 퍼트리며 이단으로 몰아 결국 그들 모두를 화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을 국유화시켜버렸습니다. 아비뇽으로 옮긴 클레멘스 5세 교황에게도 종교적인 독립성은 없었고 오히려 프랑스의 필립 4세 왕의 협박에 의해 성전 기사회를 지켜내지는 못했습니다.


200년 동안 유지했던 성전 기사회의 장점과 단점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태어나고 사람의 욕심에 의해서 사라진 이 성전 기사 수도회에 가장 중요한 하느님의 사랑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이 그 당시 교회와 성전 기사회를 위해 만든 '죄가 되지 않는 살인'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믿으려는 마음과 함께 교회를 그리고 시토회를 그 살인의 죄로부터 자유롭게 했을지 모르지만, 십자군 전쟁 이후 성전 기사회와 함께 쇠락의 길을 걸은 시토회도 적어도 이 시기만큼은 하느님 앞에서 '정의로웠다'라고는 얘기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성년 (1) :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거룩한 해 (L’anno Santo)로써 가톨릭 교회에서는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 이후 50년마다 한 번씩 선포되다가 1450년 이후부터는 25년마다 지내고 있다. 다음 성년은 2025년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