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까자마리 수도원에서 한 45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같은 시토회인 포사노바 수도원 (Abbazia di Fossanova)이 있습니다. 까자마리 수도원보다 9년 빠른 1208년 축성된 수도원이고 현재는 시토회 수사들이 거주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토회 수도원 건물이나 기본적인 구조가 까자마리 수도원 보다 보존이 잘 된 곳입니다. 시토회 수도원은 먼저 말했던 것처럼 거의 동일한 구조로 수도원을 세웠기 때문에 건축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은 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까자마리 수도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소들과 성 베르나르도와 관련 있고 중세 십자군 전쟁 중에 나타난 성전 기사 수도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처음 이곳에는 6세기에서 11세기까지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성인에게 봉헌된 베네딕도 수도원이 있었던 곳이었고 827년에 교황좌에 오른 그레고리오 4세 교황도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때의 건물은 현재 수도원 사각 정원의 남쪽 편을 제외한 세 방향의 회랑과 기둥으로 남아있습니다.
1130년 호노리우스 교황의 서거 이후, 교황좌를 차지하기 위해 교황청은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을 지지했던 추기경들과 대립 교황이었던 아나클레토 2세를 지지한 추기경으로 나누어져 다툼이 있었고,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는 인노첸시오 2세의 정통성을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이 덕분에 교황좌에 대한 정통성을 확립한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은 이곳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원을 시토회에 합치게 하였고, 시토회 수도자들은 근처에 있던 아마세노 강에서 새로운 하천을 수도원으로 끌어들여 그들이 자립적 생산에 맞는 수도원을 새롭게 만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포사노바 (새로운 인공 개천)라는 수도원 이름이 만들어졌습니다.
중세 시기 교황청은 전 유럽의 그리스도교인들의 중심 역할을 하기에는 행정적으로 잘 준비된 전문가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된 사람들 중에 수도원 출신들이 많았고 수도원의 역량으로 교황청도 그 힘을 발휘하고 싶었지만 1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수도원은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권력 아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개혁 수도회들의 등장과 이곳 출신 수도원장들이 교황이 되면서 개혁 의지는 수도원에서 교황청으로 확장이 되었고, 여기에 점조직으로 있던 수도원은 어머니 수도원과 아들 수도원의 개념을 가진 연합회가 등장하면서 교황청은 전 유럽에 정보를 수집하고 교황청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수도원 네트워크를 가지게 됩니다. 바로 이 네트워크의 시작이 시토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세기까지는 예수님께서 영적인 세상의 권한은 교황에게, 속적인 세상의 권한은 황제에게 주었다는 양검론의 시절이었습니다. 이것을 교황은 태양이요 황제는 그 빛을 받고 빛을 낼 수 있는 달이라는 개념으로 만들고 싶었던 교황청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목표 아래 황제도 하지 못했던 일인 그리스도교인의 일치를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된 하나의 군대를 만들기를 원하였고, 이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시토회라는 인프라 라인이었습니다.
십자군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에 있던 시토회 수도원장들은 설교를 하였고 심지어는 십자군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따라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시토 수도원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상주하면서 이슬람과 전투를 치를 수 있는 상비군인 성전 기사 수도회의 창립에도 관여를 하게 됩니다.
1119년 프랑스의 기사 위그 드 파엥은 동료 여덟 명과 함께 요한 기사회처럼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명목으로 예루살렘 왕으로부터 성전산 근처의 건물을 받으면서 성전 기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9년 만인 1128년 트루아 공의회에서 호노리우스 2세 교황으로부터 교황 직속 수도회로 인준을 받았고, 베르나르도는 1135년에 ‘새로운 기사단을 찬미하며’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지지로 교황좌의 정통성을 얻은 인노첸시오 2세 교황을 설득하여, 1138년에 세속의 권한으로부터 자유롭고 면세 혜택 등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완벽한 선물 (Omne Datum Optimum)’이라는 칙서를 받게 해 줍니다. 이렇게 탄생된 성전 기사 수도회였기 때문에 성 베르나르도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성 베르나르도가 성전 기사 수도회의 직접적인 창립자는 아니었지만 위그 드 파엥은 베르나르도와 친척이었고 이 수도회의 회헌이 만들어지는 데에 많은 기여와 합법성을 제시하였습니다.
청빈, 정결, 순명을 지켜야 하는 수도자이면서 이교도인들과 싸워야 하는 군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세우는 데 기여한 베르나르도는 ‘새로운 기사단을 찬미하며’라는 편지에서 이들의 특별한 존립성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였습니다. 이 수도회의 공적인 호칭인 솔로몬 성전과 그리스도의 가난한 군대 (Poveri compagni d'armi di Cristo e del tempio di Salomone)라는 이름처럼 바로 수도자 군인이라는 합법성을 세우는 것이었고, 그중에 사람을 죽여도 '사람을 죽이지 말라'라는 십계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죄가 되지 않는 살인’이라는 개념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이 편지에서 말리치디움 (malicidium)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살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 (homo)과 말살 (cidium)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인 라틴말 호미치디움 (homicidium)이라는 말을 변형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homo (사람)라는 일반 대명사를 mali (나쁜 것)라는 부분 대명사로 바꾸어 사용함으로써 신앙이 없고 그리스도교인들의 안전에 위배되는 것을 말살할 수 있는 정당성을 이 단어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의 3장 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기사는 충분한 양심으로 죽일 수 있고 편하게 죽을 수 있다. 죽어서 구원을 받고 죽이면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 베르나르도가 무조건적인 이교인들에 대한 죽임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던 것처럼, ‘충분한 양심’이라는 전제 조건을 쓰면서, 이교인들을 죽이기 전에 자신이 그들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죄를 온전히 회개했는지를 먼저 살피라고 하고 있고, 이교인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을 죽이려고 하거나 위해를 가하려고 하였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선제 조건으로 달아 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적들 앞에서 이런 자신의 회개와 양심 성찰은 뒷전으로 밀려났고, 오로지 죽여야 구원받는다는 말만이 큰 메아리를 치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치 구약의 하느님께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십계명으로 주셨지만,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이민족들은 전멸시키고, 계약을 맺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 것처럼 (참조. 신명7,14) 말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슬람 사람들은 다른 신을 섬긴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같은 신을 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에서 시토회는 성전 기사단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며 13세기 말 십자군 전쟁이 끝나면서 모두 쫓겨나게 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단독으로 술탄을 찾아가 평화와 공존을 이야기한 거지 프란치스코 덕분에 프란치스코회는 지금까지 예루살렘에서 성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까자마리 수도원 성당과 포사노바 수도원 성당은 시토회의 전형적인 형식의 문을 동일하게 갖고 있지만 문 위에 들어가는 상징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까자마리의 포도 문양은 공동체의 중심이고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면, 포사노바의 성당 문은 십자가를 문 중심에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해 부활을 얻는다는 성지 기사단의 생각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십자가는 우리가 많이 보는 라틴 십자가가 아니라 가로 세로 길이가 같은 예루살렘 십자가입니다. 이것은 포사노바 수도원이 성전 기사회와의 강한 연대감뿐만 아니라 그 정신도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시토회와 성전기사회의 이러한 친밀한 관계성은 포사노바 수도원 곳곳에 있는 성전기사회의 십자가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수도원은 성전기사회에 ‘완벽한 선물’이라는 칙서를 주신 인노첸시오 2세 교황과 관련된 성당이다 보니 더 그럴 것입니다.
모자이크로 장식이 된 중앙 부분에서 성전 기사회 십자가를 제일 먼저 볼 수 있습니다. 붉은색을 사용한 정 십자가의 형태이고 십자 끝의 꼭짓점은 두 개씩 모두 여덟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기사회 십자가를 진복팔단 십자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8이라는 숫자는 성전기사회의 십자가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전기사회의 십자가 모양이 아니더라도 숫자 8을 상징하는 것들을 곳곳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 반달형 창문에도 여덟 개의 기둥이 있고, 기둥과 기둥을 잇는 반원도 여덟 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당 정면 가장 위에 있는 눈의 창도 팔각형으로 만들어져 상상으로 만들 수 있는 성전 기사단의 십자가를 눈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팔각형은 성전 기사단 좋아하는 8을 상징하는 도형이었고 성당의 종탑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곳의 종탑도 시토회 정신에 맞게 성당과 분리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지붕의 가로와 세로가 겹치는 부분에 붙여서 종탑을 세워 건축의 과함을 피하였고 모양은 팔각형으로 만들어 성전기사회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층으로 된 이 종탑 각 면은 두 개의 구멍이 나있는 창이 있고 가장 윗부분을 작은 크기로 올려놓음으로써 고딕의 상징인 상승성을 이 단순한 성당에서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탑의 모양은 로마네스크나 고딕 시절에 볼 수 있는 건축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바로크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신가요? 이유는 번개에 의해 종탑이 무너졌고 16세기에 다시 만든 종탑이기 때문입니다.
성당 내부에도 성전 기사회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앙 제대화 수도자들의 유해를 모아 덮은 바닥 뚜껑의 조각도 역시 성전 기사회를 상징하는 십자가이고, 제단 압시대 가장 윗부분 창문도 숫자 8을 상징하는 조그만 원 여덟 개가 창문 주위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 8이라는 숫자는 끊어지지 않는 무한함을 보여주면서 시작도 끝도 없는 하느님의 시간, 아이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