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Santuario della Madonna Madre delle Grazie della Mentorella
이렇게 어렵게 도착한 성지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성지 가는 것을 그리고 운전하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나지만 이번만큼은 다음에 다시 올까라는 망설임의 생각이 서너 번은 내 머릿속을 지나갔기 때문입니다. 랠리 스포츠카 선수가 출발하기 전에 지도를 펴고 도착 지점까지 어느 곳에서 길의 커브가 심하고 어느 구간에서는 속도를 내야 할지를 미리 암기하고 출발하는 것처럼 내비게이션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나 자신도 집에서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공부 아닌 암기를 하고 떠났었습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이 일반화된 이후로는 아무리 먼 곳이라도 도착 지점을 찍고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에 나의 모든 운명을 맡기고 그 음성이 천상의 목소리인 양 따라가는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내비게이션은 최단거리, 최단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시된 기계다 보니 일반적인 도로가 아닌 산속의 어느 지점을 목적지로 정하면 정말 이 길을 계속 가도 되나 할 정도로 미지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이 그랬습니다. 45도 정도의 가파른 길을 갑자기 들어선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분명히 일방 도로 표시가 없었으니 양방향 길이 긴 할 텐데, 중앙선도 없고 도로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흰 선이나 가드레일도 없었습니다. 차를 되돌릴만한 공간도 당연히 없으니 진퇴양난, 난공불락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자성어만 머리를 맴돌면서 결국은 최후의 보루인 주님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를 드린 후 지그재그의 산길을 따라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내려오는 차는 없었고 방목된 소와 말들을 보면서 그렇게 걱정하던 맘은 점점 사라져 갔고, 어느새 '아 좋다'라는 맘이 가득 차기 시작하며 사막에서 오아시스가 등장하듯 멘토렐라 성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씀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오 6장 34절
멘토렐라 성지는 로마에서 대략 6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프레네스티니 (Prenestini) 산의 해발 1018미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성모 성지로써는 이태리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가장 오래된 장소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67년도에 성지와 가장 가까운 도시인 과다뇰로 (Guadagnolo)와 연결된 아스팔트 도로를 만들면서 자동차로 접근성이 용이해졌지만, 그전까지는 이곳에 오려면 순례자들이 걸어온 산길을 통하여 도보로만 이동이 가능했었습니다.
성지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병풍처럼 펼쳐진 이탈리아의 등줄기라고 할 수 있는 아펜니노 산맥과 그 아래 크고 작은 도시들이 눈 아래 펼쳐져 있는 것을 보면 무소부재한 하느님이시지만 지금 이 순간은 나와 더 가까이 계실 것 같은 마음을 들게 합니다. 그리고 오래전에 읽었던 김정훈 부제의 유고집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라는 제목과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성모 성지이지만 두 명의 성인과도 관계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 두 분은 바로 성 에우스타키오 (S. Eustachio)와 성 베네딕도입니다.
그림 설명 : 왼편 판화에는 예수님께서 "플라치도야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묻자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라고 플라치도가 답하는 장면이다. 오른편 사진은 미니어처에 그려진 성 에우스타키오의 회개와 기적이다. (13세기 미니어처, 출처: Wikimedia commons)
13세기에 기록된 '황금의 전설'에 따르면 에우스타키오는 트라이아노 황제 (53-117) 시절 플라치도 (Placido)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던 백인대장이었고 그리스도교로 개종 전에는 로마의 이교도로써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기 좋아했지만 그 역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플라치도는 사냥을 나가 사슴을 쫓고 있었는데, 절벽 끝에서 돌아선 사슴뿔 사이에서 빛나는 십자고상을 보게 되고 그 십자가에 겹쳐져서 한 사람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마치 다마스쿠스로 가던 바오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플라치도야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시며 " 나는 네가 알지는 못하지만 이미 존경하고 있는 예수이다”라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집에 돌아온 플라치도는 아내에게 사냥 중 겪었던 신비스러운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놀란 얼굴로 플라치도가 예수님을 만나던 그 시간에 자신 또한 환시를 보았다고 하며, 모르는 어떤 사람이 남편과 함께 내일 자기에게 올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든 그리스도인이 아니든 우리에게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심은 의롭지 못한 것을 나쁜 것이라고 느끼게 해 주며 힘들고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입니다. 정의로운 마음, 측은한 마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을 위해 선함을 위해 행동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은 주님의 자비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2천 년 동안 지켜오던 도그마를 깨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르는 신비와 자비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님에도 양심에 따라 살면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선포하였기 때문입니다. 플라치도는 주님을 몰랐지만 양심에 따라 주님을 이미 따르고 있었고 어려운 이웃에 측은한 마음을 갖고 있던 아내는 회개하고 돌아온 남편을 보자 주님이 함께 오셨음을 알아본 것입니다.
플라치도는 다음날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주교를 찾아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플라치도는 '좋은 곡식을 주는 자'라는 뜻의 에우스타키오, 부인은 '하느님을 믿는 자'라는 테오피스타, 한 아들은 같은 뜻의 테오피스토 그리고 다른 아들은 '자선의 삶을 사는 자'라는 뜻의 아가피오라는 세례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성 에우스타키오가 사슴을 통해 예수님의 발현을 본 자리를 기념하여 그 절벽 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성당을 세웠고 실베스트로 1세 교황이 순교자 에우스타키오에게 봉헌을 한 것입니다.
에우스타키오는 그 후 구약의 욥처럼 신앙의 시련을 겪으면서 아내와 아들들과 헤어지기까지 하였지만 신앙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하느님의 섭리에 의탁했으며, 수년 후 기적적으로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아드리아노 황제 (76-138) 시절 그리스도교인으로서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 지내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콜로세움에서 맹수들에게 온 가족이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맹수들은 그들을 공격하기는커녕 오히려 머리를 숙이며 순한 양처럼 되었고 결국 성인과 그 가족은 갖은 고문과 황소 모양의 불 끓는 청동 화덕 속에서 자신들에게 모습을 보여주신 주님을 증거 하며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곳을 방문하여 순교자인 에우스타키오 성인을 기념하여 주님께서 사슴뿔 사이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신 장소에 오라토리오 (기도소)를 세우게 하였고 동시대 교황이었던 실베스트로 1세는 하느님께 봉헌하는 축성을 하였다고 합니다. 현재의 소성당은 17세기 중반에 다시 세운 것이고 에우스타키오의 회개와 순교에 관련된 프레스코화가 소성당 내부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성당을 향해 올라가는 계단은 '거룩한 계단 (Scala Santa)'이라고 부르고 있고, 이것 역시 17세기 때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소성당 옆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듯 세 개의 종이 달려있고, 그 아래에는 이 종을 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글이 적혀있습니다.
Non far da campanaro se il cuor tuo non batte da cristiano.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면 종을 울리지 마십시오.
로마에 오신 분이라면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인 판테온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판테온 뒤에 에우스타키오 성인에게 봉헌된 성당이 있다는 것을 아는 분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순교자인 에우스타키오 성인의 집 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처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경당이 세워지게 되었고, 또한 이 장소에서 에우스타키오 성인과 가족들이 순교하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795년 교황 레오 3세 시절 이곳은 로마의 부제들이 있었던 장소로 언급이 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성당의 모습으로 처음 세워졌던 시기는 교황 첼레스티노 3세 시절인 1195년으로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을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16세기에는 고아들과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오라토리오회를 만든 필립보 네리 성인이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장소로 유명해지기도 하였지만, 현재 보는 성당 모습은 중세 때 만들어진 성당을 부수고 그 위에 17세기와 18세기 사이에 다시 건축한 바로크 양식의 성당입니다.
성당 정면 위에는 에우스타키오 성인이 멘토렐라에서 본 사슴 머리 위에 십자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성당 지하에는 에우스타키오 성인이 살았던 로마 시대의 유적들이 있고 아마도 이곳에서 성인은 그 당시 로마에 들어왔던 가난한 사람들, 특히 로마 제국 주변에서 온 외국인들을 불러 모아 하루에 필요한 음식을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성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것을 기억하며 지금도 하루의 음식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120명분 정도의 음식을 준비해서 성당 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있는 귀한 장소입니다. 그래서 이 성당은 '가난한 사람들의 식당'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