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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Apr 16. 2022

성 갈가노 대수도원

순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전편에 이어서...


성 갈가노 대수도원

Abbazia di San Galgano


갈가노 성인이 살아있을 때 혹은 선종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로마 남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시토회 소속의 카자마리 수도원 수도자들이 몬테시에피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성인의 무덤 옆에서 성인의 삶을 따라 살고 있던 은수자들을 흡수하며 성인의 유해가 있는 무덤 건물에 지금도 볼 수 있는 현관을 증축하고 여기에 덧붙여 종탑과 수도원 건물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좁은 봉우리 위에 늘어나는 수도자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은 턱없이 부족하였고 위치 자체도 시토회 수도자들의 정신에 맞는 수도 생활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즈음 이곳을 관할하고 있던 볼테라 (Volterra)의 주교 일데브란도 판노키에스키 (Ildebrando Pannocchieschi)의 조언과 허락을 받아 물이 흐르고 넓은 땅도 펼쳐져 있는 언덕 사이로 내려오게 됩니다.


이곳에 수도원을 세운 이유는 시토회 수도원 건축 규범에 따라 장소를 선택하는 원칙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토회는 자신들의 수도 생활을 지속하는 데 있어 자급자족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수도원 가까이 흐르고 있는 메르세 강물과 농사지을 수 있는 넓은 땅 그리고 이 농작물들을 내다 팔 수 있도록 주변 도시와 소통이 되는 넓은 길들이 있는 이곳은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성당과 수도원 건물도 시토회 영성과 철학을 그대로 적용하여 세웠습니다. 단순하며 장식이 없고 비율적으로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였고, 이것은 이곳에 사는 수도자들의 마음에 안정을 주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성 갈가노 대수도원 (출처: architetti.com)

성 갈가노의 대수도원은 1218년과 1288년 사이 시토회의 카자마리 수도원에서 온 수도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토스카나 지방의 첫 번째 고딕 건물이었고, 그래서인지 성당의 모습은 로마 남부에 위치한 카자마리 수도원이나 포사노바 수도원과 거의 쌍둥이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시토회 건축은 베르나르도 성인이 만든 규범을 철저하게 따르는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갈가노 대수도원은 건축할 당시부터 토스카나 지방에서 가장 강력하고 풍요로운 첫 번째 수도원이 되었습니다. 이 지방에서 갈가노 성인에 대한 명성과 함께 그분의 삶을 따르려던 수도자들 대부분은 성 갈가노처럼 기사가 되려고 했던 귀족 집안사람들이 많았고 더불어 귀족들의 기증도 줄을 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인리히 6세, 오토 4세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 황제까지 이 수도원에 대한 보호와 함께 많은 특혜를 약속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수도원이 교황청에 내야 할 십일조에 대한 면세까지 해주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성 갈가노의 대수도원에서 시에나 공화국의 국고를 담당하는 역할을 우고 (Ugo)라는 수도승이 맡으면서 주변 도시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또한 시토회의 축적된 건축 기술과 수리 사업은 수도원 옆을 흐르고 있는 메르세 강물을 시에나까지 연결하는 수도 공사까지 맡아서 하였습니다. 물을 이용한 기술은 중세 시절 수력을 기초로 하는 방앗간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와 관련된 제분과 물이 많이 필요한 모직과 염색업까지 소유하며 수도원의 재산은 더 늘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시토회 건축의 기초가 되는 고딕 기술은 시에나 주교좌성당을 건축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 유명한 니콜라 피사노 (Nicola Pisano)의 복음 선포대를 만드는 데에 많은 수도승들이 협조하면서 멜라노 수사는 자기의 이름을 올리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주변 도시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의 밀접한 관계는 자급자족의 개혁 수도회라는 시토회 원초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좀 멀어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러한 인간적 풍요 속에 수도원의 번영도 그렇게 오래가지를 못했습니다. 1328년의 기근과 1348년의 페스트라는 전염병은 인구의 감소와 함께 수도원에 필요한 노동력의 감소로 이어졌고 이것은 갈가노 대수도원의 수도자 입회 숫자를 정체시켰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문화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외국의 용병들은 수도원을 약탈의 대상으로 생각하였고, 성 갈가노 수도원도 피렌체의 영웅으로 추대되어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 안장되고 파울로 우첼로가 그의 승마 초상화까지 그려주기까지 한 조반니 아쿠토(Giovanni Acuto)에 의해 두 번이나 약탈당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수도자들은 8명까지 줄어들었다고 하고 결국 1474년에 시토회 수도자들은 시에나에 갈가노 궁 (Palazzo di San Galgano)을 만들어 수도원을 버리고 이주하게 됩니다.


결국 교황과 시에나 공화국 사이에 수도원 소유에 대한 분쟁이 일어났고 콤멘다 (Commenda)라는 교황 대리 수도원장이 위임을 맡으면서 수도원의 발전보다는 성당 지붕에 들어간 납 덮개를 떼어내 파는 등 대리수도원장들은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욕심으로 부서져가던 수도원에 결정적으로 하늘의 심판처럼 1786년 내리친 번개에 종탑이 맞아 넘어지면서 성당 지붕을 모두 부숴버리게 됩니다. 시토회는 전통적으로 종탑을 성당과 분리해 따로 세운 것이 아니라 성당 지붕 중심 위에 세웠기 때문에 그 피해는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789년에 더 이상 수도원 성당에서는 전례가 이루지지 않는 장소로 결정이 되어 일반 건물로 전락이 되었습니다. 1924년 복원 공사가 시작됐지만 성당의 모습을 되찾으려 했던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부서져 내리지 않도록 하는 보존 목적의 복원 사업이었습니다.


시토회 건축이나 장소에 대한 설명은 먼저 올렸던 시토회 편을 참고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사진과 함께 보충 설명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갈가노 수도원 성당 내부
성당 정면
동쪽에서 바라본 성당 뒷면
북쪽에서 바라본 성당 측면. 수도원 공동 무덤으로 나오는 죽음의 문이 조그맣게 보인다.
남서쪽에서 바라본 성당과 수도원 사각 정원

라틴 십자가 (70x21m) 형태를 가지고 있는 수도원 성당은 제대는 정동 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당의 왼편인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성당 왼편 남쪽에 위치한 수도원 건물에서 생활하는 수도자들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고, 수도원과 연결되어 있는 오른쪽 날개 회랑에는 수도자들이 드나드는 문이 있고 반대로 왼쪽 날개 회랑의 문은 죽음의 문으로 수도자들의 유해가 공동 무덤으로 나가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성당 기둥에 유일하게 조각돼있는 사람의 얼굴. 첫 번째 사람인 아담으로도 이야기하지만 이 성당의 마지막 건축가였던 마페오의 우골리노로 추정하고 있다.
성당 오른편으로는 수도원 생활의 중심 역할을 했던 사각 정원의 일부 건물이 남아있다.
정원 회랑에 가장 중요한 장소인 규칙서의 방 (sala di capitolare)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규칙서의 방에 있는 창문의 하나
위 사진의 창문을 보면, 가운데 주두에는 기둥이 비어있고 여섯 개의 입이 있는 식물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십자군이었던 성전 기사단의 표시 중에 하나이다. 시토회가 성전 기사단과 연관이 되어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아래 사진은 스크립토리움 (scriptorium)이라는 장소로써 역시 사각 정원 회랑과 연결되어 있다. 이 장소는 외부에서 일하지 않고 수도원 내에서 기도에 전념하는 수도승들이 손노동을 하는 곳이다. 주로 기도서나 시편을 필사하였다. 이 스크립토리움과 규칙서의 방 2층에는 기도 수도승들이 거처하는 독방과 소성당이 있었다. 수도원의 나머지 장소들은 모두 사라져 볼 수는 없지만 먼저 편에 설명한 카자마리 수도원을 기준으로 추측해 본다면, 사각 정원 남쪽에는 기도 수도승의 식당과 부엌 그리고 노동 수도승이 식당이 있었을 것이고, 사각 정원 서쪽으로는 1층에는 노동 수도승의 창고, 2층에는 노동 수도승의 독방이 있었을 것이다.
(출처: altervista.org)

고딕은 로마네스크의 둥근 아치를 변형하여 건물의 하중을 더 버텨낼 수 있는 뾰족아치와 함께 더 높이 건물을 올릴 수 있는 버팀기둥을 세워 수직 상승의 효과를 최대화시킬 수 있었던 획기적인 건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당 내부로 들어서게 되면 단지 주변만 둘러보게 했던 예전 성당들과는 다르게 고개를 들어 높이 있는 천장을 자기도 모르게 바라보도록 만들었고 이것은 하느님이 계시는 천상교회를 상상하게 해 주었습니다.

 

비록 천재지변에 의해 대성당의 천장이 부서져 하늘이 훤히 보이게 되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을 성당 내부에서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기도 하였고 천장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늘을 떠받치는 성당이라는 느낌에 더 웅장하면서도 진정한 고딕 성당이 무엇인지를 더 느끼게 해주는 듯합니다. 세상 끝나는 날 천상교회와 지상교회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지금 맛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내게는 미완성의 복원이 아니라 완성된 보존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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