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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Apr 13. 2022

몬테시에피 은수처와 갈가노 대수도원

순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키우스디노 Chiusdino

키우스디노 전경 (출처 : 위키피디아)
키우스디노 골목길

키우스디노 (Chiusdino)는 토스카나의 시에나 (Siena) 현에 속해 있고 해발 560미터에 위치한 인구 1700명 정도의 조그만 도시이지만, 롱고바르도족이 이곳을 점령했던 시기인 6세기 말 언덕 위에 군사적 요충지로써 작은 성채가 만들어지면서 이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흘렀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중세의 모습을 잘 품고 있는 집들과 골목길들이 걷는 내내 마음을 즐겁게 해 줍니다. 성 갈가노의 도시인 키우스디노에는 성인이 태어난 집의 외부와 성당으로 변한 내부를 볼 수 있고 1180년 12월 5일 성인이 탄 당나귀가 미카엘 대천사를 보고 무릎을 꿇었을 때 당나귀의 무릎 자국이 남아있는 신비로운 바위가 성당 오른쪽 구석에 남아있습니다.


12세기 성 갈가노의 생가
당나귀의 무릎 자국이 있는 바위


성 갈가노의 간단한 생애와 몬테시에피 은수처 성당


아시시를 지나가던 한 순례자가 산통으로 고통받고 있던 집에 들어와 프란치스코의 어머니에게 아기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장소와 같은 집 밖의 마구간이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성 갈가노에게도 신비스러운 탄생의 일화가 있습니다. 아버지 귀도 (Guido)와 어머니 디오니시아 (Dionisia)는 오랜 시간 동안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미카엘 대천사의 중재로써 아이를 임신할 수 있었다고 하고 1148년에 태어나는 아이가 키우스디노성 갈가노입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부유한 삶을 살았던 갈가노의 어린 시절은 성 프란치스코의 어린 시절과 흡사했습니다. 십자군 전쟁 속에 기사도의 이야기가 영웅 미담처럼 그리고 전설처럼 퍼져나가던 시기에 살았던 갈가노는 귀족 집안이라는 배경으로 이미 누구나 꿈꾸던 기사가 쉽게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격은 폭력적이었고 세상의 쾌락에만 관심을 보였으며 인생에 대한 명확한 목적도 사실상 없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에서 세상의 유한함을 느꼈고 자신의 방탕스러운 삶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삶의 방향과 목적으로 하느님께 점차 의지를 두기 시작하였습니다.


갈가노 앞에 발현한 성 미카엘 대천사
바위에 칼을 꽂고 기도하는 성 갈가노 (키우스디노 박물관)

그러던 중 미카엘 대천사의 안내와 도움으로 세상을 버리고 몬테시에피 (Montesiepi)라는 곳에서 은수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려고 하였지만 주변에서 마땅한 나무를 찾지 못하였고, 결국 몸에 지니고 있던 기사의 칼을 바위 사이에 꽂아 넣어 십자가를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이 모습에서 기억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6세기경 영국 땅에 있었던 브린튼 족이 앵글로색슨 족의 침입에 교회 앞 바위에 박혀있던, 신이 선택한 자만이 뽑을 수 있다는 칼을 뽑아 백성을 구한다는 '아서왕의 전설'입니다. 우리에게 '엑스칼리버의 전설'로 더 많이 알려진 이 이야기의 바위에 꽂혀있는 칼에 대한 영감을 준 것이 바로 갈가노의 바위에 박힌 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더 나아가서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이 나타나면 자신의 칼을 뽑아 정의를 행할 것이라는 말도 남겨놓음으로써 하느님의 정의가 이 칼로 다시 이루어질 것처럼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성 갈가노가 미카엘 대천사의 인도로 몬테시에피산으로 들어가 은수 생활하는 부조
바위에 칼을 꽂는 모습 (키우스디노의 성 갈가노 박물관)

어쨌든 아서왕은 신의 선택으로 바위의 칼을 뽑아 자기의 백성들을 구하였지만 이것은 중세 시절 기사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목적으로 만든 소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은 그 반대였으니깐요. 성 갈가노는 칼을 바위에 꽂아 넣음으로써 무기로써 일어날 수 있는 살육과 전쟁에 대한 영원한 포기를 선언한 것이고 동시에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온전한 투신이었습니다. 이것은 기사들에게 칼로써는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가르침이기도 하였습니다.


딱딱한 바위는 정의 실현이 십자군 전쟁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당시 교회나 사람들의 굳은 마음과 선입견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 갈가노의 칼은 이 굳어버린 마음 안에 하느님이 말씀하신 새 살을 만들기 위한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키엘 36장 26절


전쟁과 죽음의 도구로 쓰인 칼은 바위에 박혀 십자가가 되었고, 이 십자가는 사람들의 돌처럼 굳어버린 마음을 부드러운 살로 만드는 평화와 희망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기사들의 자부심의 상징인 어깨의 망토는 은수자의 겸손하고 가난의 옷이 되었습니다. 이 살로 된 마음이라는 것은 그 당시 가장 필요했던 사랑과 평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 갈가노는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렇게 시작된 평화가 누구에게서 완성되었는지 아십니까? 이 평화의 십자가를 세상에 심어놓은 갈가노 성인은 일 년 후인 1181년 12월에 선종을 하십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182년에 아시시에서 제2의 그리스도라는 별명을 가진 프란치스코가 태어납니다. 프란치스코는 성 갈가노가 심어놓은 평화의 나무를 온 세상에 전하면서 '평화의 사도'라는 호칭으로 완성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밤사이 이슬비처럼 내려오는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가 놀랍게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에레모 몬테시에피 외부
에레모 몬테시에피 내부

13개월의 은수 생활을 한 후 33세가 되던 1181년 12월 3일에 성 갈가노는 선종을 하였고, 1185년에 은수 생활을 했던 장소 위에 기념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이 해는 갈가노가 교황 루쵸 3세 (Lucio III)에 의해 시성이 된 해이기도 합니다. 초기에 이 건물은 성 갈가노의 유해와 바위에 꽂은 칼을 보관하기 위한 하나의 영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당은 외부와 내부 모두 영원성을 상징하는 원형으로 되어있습니다. 특히 내부는 두 가지 색으로 교차하는 벽돌이 둥근 천장으로 향하며 점점 작아지는 원들의 모습은 성인뿐만이 아니라 이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도 끝나지 않는 하늘나라로 들어 올릴 것만 같습니다.


성당 중앙 바닥에 있는 성 갈가노의 칼

성당 중앙에는 갈가노 성인이 바위에 심어놓은 십자가 모양의 칼잡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칼에 대한 진위성 논란도 있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탄소 연대 측정 결과 12세기의 칼이라고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이 검 옆에는 미라의 팔 같은 사람의 뼈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성당을 찾던 사람들 중에는 순례자들도 있었지만 '아서왕의 전설'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이 검을 뽑아가려던 도둑들도 많았습니다. 도둑들이 칼을 훔치려는 시도를 하면 칼이 뽑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팔이 뽑혀 그 팔을 이곳에 두고 가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였습니다.


도둑의 팔 뼈


로렌체티 소성당


성당 왼편에는 이 성당과 붙어있는 유일한 소성당이 있습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이 소성당은 원형인 성 갈가노 성당과 다르게 사각으로 되어있습니다. 특별한 성인의 이름을 붙여지는 대신에 이 소성당 안에 프레스코화를 그린 시에나 출신의 화가 암브로시오 로렌체티 (Ambrogio Lorenzetti, 1290-1348)의 성을 붙여 로렌체티 소성당이라고 부릅니다. 이곳의 그림은 손상이 많이 되었고 20세기에 복원을 거쳐 지금의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습니다.


로렌체티 소성당 (출처 : confraternita-sangalgano.it)

들어가면서 제대가 있는 정면 벽 위에는 옥좌에 앉아 아기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성 마리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옆에는 성모님의 사랑과 순결을 상징하는 장미와 백합을 쟁반에 담아 무릎 꿇고 바라보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네 명의 복음 사가들이 있고 그 밑으로는 시토회를 창립한 몰렘의 성 로베르투스 (왼쪽)와 시토회를 번성시킨 키아라발레의 성 베르나르도 (오른쪽)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 로베르투스 뒤에는 교황의 모자를 쓰고 있으며 갈가노를 시성한 루쵸 3세 교황이 역시 경건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소성당에는 세 개의 손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마돈나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림을 확대해서 손을 찾아봐주세요). 성모님에게 세 개의 손이 등장하는 것은 동방교회에서 도움이 신 성모를 표현하는 이콘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이콘은 다마스코의 성 요한 (650-750년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요한은 사제이자 동방교회의 마지막 교부였으며 '성화에 관한 세 편의 연설'이라는 책으로 이콘에 대한 공경이 중요하고 올바르다는 것을 밝힌 성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동로마 제국 황제 레오 3세 (717-741)는 성화 논쟁을 일으키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이콘을 파괴하였고, 622년부터 동로마 제국으로 침입한 이슬람교도들도 마찬가지로 이콘에 대한 공경을 우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요한은 손이 잘리는 형벌을 당하였지만 이콘에 대한 신앙심을 잃지 않고, 자기의 손이 다시 나을 수 있도록 이콘 앞에서 자신의 잘린 손을 들고 자신의 손이 치유가 된다면 계속해서 이콘에 대한 공경을 할 수 있도록 싸우겠다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손은 기적적으로 다시 붙었고 이 기적을 감사하고 증거하는 의미로 그 이콘 아래에 자신의 잘린 손을 그려 넣게 됩니다. 


세 개의 손 이콘

이때부터 '세 손의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콘이 생겨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슬라브족이 살던 곳에서는 마치 세 개의 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변형된 이콘에 대한 공경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성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이며 우리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두 손으로는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만 나머지 자유로운 또 다른 손은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늘 준비가 되어있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서 아기 예수님에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당신의 손을 뻗치고 계십니다.


성모님 발아래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부드러운 흰색 원피스를 입고 누워있는 여인은 하와입니다. 어깨에는 사치함을 상징하는 산양의 털로 덮고 있고, 왼손에는 원죄를 상징하는 무화과 열매를 들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무화과는 여성의 성적인 것을 이야기하면서 원죄의 결과물인 출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와의 오른손에는 두루마리 종이가 펼쳐져 있고 여기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태중에 있는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는 수난의 고통을 받습니다'. 즉, 원죄의 굴레를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로렌체티의 또 다른 밑그림

그 아래 창 양옆으로는 수태고지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복원을 하면서 로렌체티가 그리려고 했던 또 다른 밑그림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원래의 가브리엘 천사 뒤에 또 다른 천사의 모습이 있음이 보이고 있고 이 모습의 가브리엘 천사는 얼굴을 들고 있으며 약간은 위협적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겁에 질려 기둥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을 의뢰한 사람들은 이 상황을 피하고 싶고 약간은 수동적으로 보이는 마리아의 모습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마지막 모습은 얼굴만 그려져 있고 가슴에 손을 모으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순명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개인적 느낌으로는 또 다른 밑그림이 드러나면서 수태고지는 더 완벽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주는 것 같습니다. 마리아의 모습 속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은 마리아의 복잡한 두 가지 심정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처녀가 임신하여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하니 인간적으로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이었겠습니까? 하지만 마음을 돌려 두 손으로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하느님이 되려는 하와의 교만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사람이 되려는 순명하는 마리아만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벽에 있는 프레스코화에서는 성 갈가노가 자신의 칼이 꽂힌 바위를 들고 미카엘 대천사의 안내로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몬테시에피산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초기 교회 성당에서는 성인 성녀들이 자신의 순교의 상징물을 들고 베드로와 바오로의 안내를 받아 천국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 것과 비교하면 같은 형식이지만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는 중세를 볼 수 있습니다. 갈가노 성인 뒤로는 루쵸 2세 교황과 성직자들 그리고 시토회 수도자들과 천사들이 있습니다. 그 아래는 미카엘 대천사 공경에 관련된 그림으로 도시 중앙에 미카엘 대천사가 발현한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의 '천사의 성'을 그리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중세 시절 키우스디노와 근처의 도시들은 미카엘 대천사의 보호를 바라는 특별한 공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성당 뒤편 오솔길을 따라 성 갈가노 대수도원으로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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