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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보스J Dec 18. 2023

생각의 '감옥'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독서일기) <생각한다는 착각(The Mind is Flat)>을 읽고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 중에서 -





<생각한다는 착각> 


영국 워릭 대학교의 행동과학 교수인 저자 닉 채터 Nick Chater는 

인간에게 우물이나 빙산에 비유되는 '숨겨진 깊은 내면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마음은 평평하다'는 원제  <The Mind is Flat> 그대로다.


그는 톨스토이의 명작 <안나 까레니나>에서 안나의 자살 동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나는 왜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선택을 했을까? 

권태로운 귀족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 싫어서?

애인 브론스키를 영영 잃어버리는 게 두려워서?

아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한 사람의 행동을 몰아가는 감정과 동기, 신념을 헤아리려고 시도하는 것은 시작부터 파멸이다. 문제는 정신적 깊이를 헤아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헤아릴만한 정신적 깊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 신념과 가치, 행동을 형성한다. 이러한 것들은 미리 산출할 수 없으며, 필요한 경우를 대비해 어마어마한 기억 저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다. (중략) 내면세계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행동은 헤아릴 수도 없이 깊고, 우리가 거의 감지할 수 없는 내적 동기와 신념, 욕망으로 우글거리는 바다 표면일 뿐이라는 느낌은 마음이 휘두르는 마술이다.  진실은 그 깊이가 공허하거나 얕다는 것이 아니라 그 표면이 전부라는 점이다. 


 내면세계, 무의식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럴 리가. 

그동안 속아왔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럴 수밖에. 

우리는 순간순간 마음을 만들어내는 기발한 이야기꾼인 뇌를 이겨낼 재간이 없으니까. 


우리는 모두 자신의 뇌가 저지르는 속임수의 희생자들이다.  

우리 뇌는 순간적으로 색깔과 사물, 기억, 신념, 선호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지어내며, 합당한 이유를 술술 뱉어내는 멋진 즉흥기관이다. 사실 우리의 의식적 생각이라 단지 반짝이는 표면에 지나지 않지만, 뇌는 이러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색깔과 사물과 기억과 신념, 선호로 이뤄진 깊은 내면의 바다에서 끌어올린 것이라고 우리를 속이는 매력적인 이야기꾼이다. 



'마음이 평면'이라는 주장으로 도대체 저자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인간이란 복잡한 사고를 하는  깊은 내면세계를 지닌 존재라는 믿음이 다 허구고 허상이라는 점을 폭로하는 것인가?


그 답은 에필로그에서 찾았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그 순간에 표면'의 깨달음이라고 해도 적지 않은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정신세계로부터 숨겨진 냉혹한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은 과거의 생각과 행동이 변신한 것이고, 우리는 가끔 우리가 어떤 선례를 고려하고 어떻게 변형할 것인지 결정하는데 상당한 자유를 누리고 결정적인 재량권을 가진다. 오늘의 생각과 행동이 내일의 선례인 것처럼, 우리는 말 그대로 순간순간 자신을 재구성하고 재창조한다. 


생각의 '감옥'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고, 만들어진 것처럼 해체될 수도 있다

The mental "prison" we create for ourselves can be disassembled 

as effortlessly as it was constructed.


 마음이 평면이라면, 우리가 마음과 삶과 문화를 상상해 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감동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또 현실로 이뤄낼 힘을 지닌 셈이다.  


얼마 전 본 유머영상이 떠오른다.

서너 살 되어 보이는 꼬마가 수영장에서 앞으로 넘어져 어쩔 줄 몰라한다.

이때 뒤에 있던 아이의 아빠가 잽싸게 아이를 일으켜 세워준다. 

방금 전까지 울고 불고 야단법석이던 아이는 

자기 종아리에도 닿지 않은 얕은 물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어쩌면 타인은 물론이요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었을 때의 막막함이

너무나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헤아릴 깊이 따위는 애초에 없었으니까. 


우리는 영영 안나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향해 무섭게 내달리는 기차를 보는 그 찰나에도 안나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그 순간 생각의 감옥에 갇힐 것인지, 과거의 세계와 완전히 결별할 것인지. 


커버 사진: Unsplash의 Marco Chilese

#독서일기#생각한다는착각#TheMindisFlat#안나까레니나#무의식#내면#윤동주#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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