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를 보고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차단하며 살다 보니
요즘 유행하는 드라마나 화제가 되는
논란거리에 늦다.
그나마 여동생이 만날 때마다
‘친절하게 ‘ 업데이트를 해줘서
시류에서 완전히 멀어지는 건 면하고 있다.
여동생은 살뜰하게 가족 챙기는 걸 좋아한다. 심지어는 언니가 놓쳐서는 안 되는 ‘인생 드라마’도 극구 챙긴다.
내가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걸 알면서도 동생은 나에게 <나의 아저씨>(2018)를 몇 번이고 강력 추천했다.
'딱 언니 스타일이야' 라며 줄기차게 권하는 동생한테
매번 '알았어'라고 대충 대답하면서 몇 년이 흘렀다.
그러다 2022년 어느 날 무슨 이유에선지 마음이 동해서 드디어 <나의 아저씨>를 봤다.
역시 동생은 나를 너무 잘 안다. <나의 아저씨>는 그저 그런 흔한 드라마가 아니었다. 나는 작품에 녹아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에 탄복하며 박해영 작가의 인터뷰를 뒤져가며 모조리 읽었다.
그렇게 보게 된 <나의 아저씨>가
내가 본 마지막 드라마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실 나는 '영화' 파다.
어릴 때도 한편에 완결성 있게 끝나는 단막극 스타일을 더 좋아했다. 뭘 보든지 깊게 몰입하는 편이라 드라마에 빠지면 큰 일이다. 한동안 미드 <Lost>에 빠져 새벽 동틀 때까지 본 적도 있다. 그런 과몰입의 폐해를 겪은 후부터는 드라마는 멀리하는 편이다.
그런데 2년 전부터 동생이 강권하는 드라마가 또 있었다.
<나의 해방일지>
동생은 <나의 아저씨>와 같은 작가라며 나를 구슬렸다. 그래? 잠시 솔깃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며 고되게 사는 삼 남매의 사는 이야기, 연애 이야기라는데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취업과 연애, 결혼을 모두 통과한 나로서는 인생 후배들의 울고 짜는 모습마저도 그저 귀엽게 보일 뿐인지라.
게다가 연애를 다루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이 날리는 심쿵 멘트는
사실 여자 마음을 너무 잘 아는
같은 ‘여자 작가'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심쿵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몇 번씩 보라고 해도 내가 꿈쩍도 안 하니
이번엔 동생도 포기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 주말에 어쩐지 내 마음이 동했다. 할 일이 태산같이 쌓인 주말이었지만 시간을 냈다.
하이라이트 요약본이긴 했지만
그렇게 나는 <나의 해방일지>에 입문했다.
아…이 진솔함과 따스함 동시에 도발적이 까지!
여지없이 또 한 번 박해영 작가에게 반하고 말았다.
여주인공 미정이가 구 씨에게 다가가 '나를 추앙해요'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장면은 아찔했다.
미정: “왜 매일 술 마셔요?”
구씨: “아니면 뭐 해?”
미정: “할 일 줘요?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개새끼, 개새끼... 내가 만났던 놈들은 다 개새끼.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무슨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구씨: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미정: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알고 보니 그 폭탄 발언은 구씨를 '추앙'하겠다는
미정이의 선언이었다.
미정: "평생 그렇게 사람 가려 만나서 잘 된 거 있어? 그렇게 고르고 골라놓고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응원하진 않아. 나보단 잘나야 되는데. 아주 잘나진 말아야 돼.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다시는 그런 짓 안 해. 잘 돼서 날아갈 것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응원만 할 거야"
미정: (카톡에 답이 없는 구씨를 생각하며) 자꾸 답을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두고 봐라. 나도 이제 톡 안 한다. 그런 보복은 안 해요. 남자랑 사귀면서 조용한 응징과 보복 얼마나 많이 했게요. 당신의 애정도를 재지 않아도 돼서 너무 좋아요. 그냥 추앙만 하면 되니까.
미정의 추앙을 한 몸에 받은 구씨는 미정의 말대로 서서히 다른 사람이 돼간다.
구씨: (미정에게 문자) 돈 생겼는데. 혹시 먹고 싶은 거. 나 구씨
구씨: 너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면 깜짝 놀란다. 응? 나 진짜 무서운 놈이거든.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 안 해.근데, 너 날 쫄게 해. 네가 눈앞에 보이면 긴장해. 그래서 병신 같아서 짜증 나. 짜증 나는데 자꾸 기다려. 응? 알아라 좀. 염미정. 너 자신을 알라고. (심쿵 굴복 ㅠ)
미정과의 사랑으로 행복을 예감하는
구씨는 낯선 행복이 두렵다.
구씨: 넌 상황을 자꾸 크게 만들어. 불행은 잘게 잘게 부숴서 맞아야 되는데 자꾸 막아서 크게 만들어. 난 네가 막을 때마다 무서워. 더 커졌다. 얼마나 더 큰 게 올까? 본능이 살아있는 여자는 무서워. 너. 무서워.
구씨: 이것만은 알아둬라. 나 너 진짜 좋아했다. 나중에 나도 내가 어떻게 망가져 있을지 나도 모르겠는데. 아무리 봐도 서울역에 있을 것 같은데, 뭐, 그전에 확 끝날 수 있으면 땡큐인데... 나 너 진짜 좋아했다.
한 번의 이별을 거쳐 두 사람은 재회한다.
‘추앙하기’를 멈추지 않은 미정은
사랑으로 충만한 자신을 만난다.
미정: 나 미쳤나 봐. 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어.
나는 이미 취업, 연애, 결혼을 통과했다고,
그 시절 고민거리로부터는 졸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산다는 건' 결국
'나 스스로와 잘 지내는 일'임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생각과 감정을 교류'하는 일.
나와의 관계에서도
타인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몫은
결국 사랑 '받음' 이아니라 '
사랑'하겠다'는 결단과 실천임을
'추앙'이라는 단어로 일깨워주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내 영원한 단짝 동생아,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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