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ENA채널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의 인기가 높다. 장애를 가까이서 오래 봐온 입장으로 '우리들의 블루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사이코지만 괜찮아'와 같은 드라마들의 인기가 고공 행진하며 장애인들이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점이 참 반갑다. 알아야 익숙해지고, 익숙해진다면 더 편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 또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 지적 장애여성과 제비 남성의 만남이 줄거리였던 10화를 보며 약간 고개를 갸웃했으나 '지적장애인도 사랑할 권리가 필요하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여성지적장애인 가족 분이 쓰신 글을 보게 되었다. 글쓴이의 언니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드라마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는 요지였고 그 글은 수많은 찬반을 받으며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글에는 '유난이다. 보기 싫으면 보지 말아라.'와 같은 댓글이 우세했다.
장애인 가족들에게 난감한 것 중 하나는 장애당사자의 2차 성징이고, 성(性)이다. 성에 자유롭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장애인의 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가족들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남자아이도 당황스러운데, 여자아이의 2차 성징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매달 하는 생리, 절대 있어서는 안 되나 혹시 있을지 모르는 임신의 위험성, 쉽게 던져지는 성추행과 성폭행의 위험 등 그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은 오래도록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0화가 불편하다는 글쓴이의 입장으로 해당 회차를 보면 기가 찰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조심을 하고 매번 전전긍긍하며 살아왔는데 장애인의 성적 선택권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무작정 딸을 감싸고 도는 것처럼 그려진 어머니의 모습도 억울했을 것이다.
미디어에서는 시선을 정할 수 있다. 어느 사람의 관점으로 그려지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나뉜다. 10화는 전적으로 어머니가 악의 입장으로 그려졌다. 9화까지 시청자들은 모두 우영우의 입장에서 우영우의 변론이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을 안고 드라마를 시청했다. 이미 우영우의 척점에 서있는 어머니는 틀린 존재로 비친다.
거기다 어머니의 과보호가 장애 당사자의 자해행동을 불러일으키고, 재판 종료 후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에 놀라는 영우의 모습, 그리고 그걸 감싸는 수연의 모습까지. 완벽히 어머니가 이성을 잃고 잘못 행동하는 것처럼 그려졌다. 이런 시선이 얼마나 위험할지 생각해보자.
"그래, 장애인도 사랑할 자유가 있지. 저 엄마 너무하네." 등의 시선으로 추후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가족들을 향해 휘둘러질 무의식의 고정관념을, 장애인의 성적 자유를 운운하며 그들의 성을 탐하려는 인간들의 악함을 두려워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드라마가 뭐 그 정도까지 영향이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이름은 김삼순 드라마 흥행으로 배출된 파티쉬에 직업 종사자들과 개명 열풍, 미디어의 성공으로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디어의 힘은 강하다. 그래서 불편함을 제대로 인지해야 더 나은 방향의 수정 ver2가 나올 수 있다. 오늘도 나의 글이 누군가를 상처 주지 않길 바라며 글을 쓰고 각본을 이어나갔을 작가와 감독이겠으나, 10화의 연출이 아쉬운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미 10화는 방영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시청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해해보려는 노력이다. '사회 한쪽에는 이런 고민들을 하는 이들도 있구나.' 하고 한번 더 생각해본다면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 됐든 무관심보다는 관심이 사회를 움직이게 하니까.
나도 겪어보지 않아 딱 내가 아는 만큼만 생각했다. 남동생을 가진 나의 시선은 더 큰 불편함을 보지 못하였다. 비슷한 장애의 동생을 가진 나조차도 여성 지적장애인의 가족들이 느끼는 고충은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딱 자기 우물만큼의 하늘만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겪어보지 않고, 생각해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입장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어려움과 고통에 지겹다, 그만해라,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가만히 있으면 변하는 것은 없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것을 가지고 타인을 비난하는 일은 우둔하다. 그저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의 비난일 뿐이다.
그 일을 겪는 이가 고통받고 힘들어한다면, 당사자가 아닌 우리들은 그저 받아들이고 이해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공감은 지능이라고 했고, 인간의 진화에는 공감능력이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다정한 것들이 서로 손을 잡으며 살아남아 오지 않았는가. 동양에서도 사람 한자는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人)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것이 아니라 써도 달아도 함께 하는 게 인간이다.
그런데도 타인이 바라보는 하늘을 부정하고 매도하는 사람들의 하늘은 영원히 그 정도일 것이다.
타인이 이고 있는 하늘을 상상하고 그려야 그만큼의 영역이 빼꼼 열린다. 그러니 공감하고 이해하려는 이의 세상이 더 넓고 풍족하다. 그들의 하늘은 시시각각 더 아름다운 모습들을 보여주며, 더 깊이 있는 하늘을 품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넓은 하늘에 그만큼 더 잦은 폭풍과 비가 내릴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큰 세상을 선택한 이의 행운일 것이다.
누구나 짐을 지는 날이 온다.
부디 서로가 서로의 짐을 지어 평안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