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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공지마 Aug 31. 2023

[한자썰87] 無, 춤 그리고 없음…!

나는 춤의 왕


갑골문 無(없을 무)는 무녀(巫女)가 춤을 추는 광경이다. 그녀는 신대를 하나씩 양손에 내리 잡았는데, 그 흩날리듯 갈라진 깃털(羽毛)들의 어지러움이 가히 영묘(靈妙)하다. 좌우로 활짝 벌린 양팔은 강신(降神)의 내림길을 열어 놓는 애타는 갈구다. ( 【 표 】 1~3 ) 주 1)


그렇게, 無는 원래 춤이었다. 춤을 가리키는 舞(춤 무)가 無와 그 상반 모양이 똑같은 이유가 그것이다. 이 둘은 그 같은 뿌리 때문이겠지만 발음마저 같다. 우리말은 '무'로 읽되 단음과 장음으로 구별하고, 중국말은 '우(wú, wǔ)'로 읽되 성조만 다를 뿐이다. 주 2)


【 표 】 無의 자형변천

흥미로운 것이 갑골문 無에 등장하는 여자 무당인 巫(무당 무) 자도 춤이 소재다. 巫는 정체 모를 어떤 신물(工)을 사이에 두고 두 무당이 마주해서 쌍으로 춤(起舞)을 추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발음도 ‘무’와 ‘우(wū)’로 舞나 無와 다르지 않다. 무당, 춤, 그리고 고도의 추상적 개념인 '없음'에 이르기까지, 그

세 가지가 하나의 한자(漢字)를 매개로 해서 서로 연결된 것이 참으로 기묘하다.


몸동작의 반복과 그것의 무료(無聊), 그리고 변화, 그 과정의 순환과 흐르는 시간에 대한 망각, 춤은 대개 그런 구조다. 그렇게 반복, 변화 그리고 순환하는 무의미한 율동이 의식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그 정도가 충분해질 무렵이면 사람들은 무념의 상태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때를 틈타서 일상에서는 도저히 경험하지 못하던 신비한 느낌들이 사람들에게 깃든다.


요란한 굿판에서 치성하는 무녀이든, 법고 소리에 섞여 장삼을 휘감는 승려이든, 교향악에 협연하여  무대 위를 발랄히 뛰어 도는 무용가이든, 귀를 찢을 듯한 음악에 맞춰 클럽 플로어 바닥에서 뜨거운 열정을 발산하는 청춘들이든, 모두가 다 그 범주 안에 있다. 그 여러 춤들이 긍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결국 ‘몰입'과 '몰아‘가 아닐까 싶다. 그 순간에 깃드는 감동과 희열이 사람들을 춤추게 만든다.


특히, 그들 중에서 신실하거나 혹은 진리에 궁구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 분들에게는 초월적인 신령과 심오한 깨달음이 찾아든다. 그들 내면에 쌓아 둔 고집스러운 인성(人性)이 사라지고 불가해의 신성(神性)이 가득히 차오르는 순간, 내가 없어지는 순간(没我), 내가 신대인지 신대가 나인지 분간이 안 되는 순간(物我一体), 그 순간이 바로 無이다.


고대에는 문자를 독점적으로 쓰고 통제하던 자들이 소수의 제사장 또는 제관들이다. 그들은 춤을 통하면 신령을 접하게 된다는 비기를 깨달아 은밀히 감추고 그들만의 전유물로 삼았다. 춤을 통해서 의식이 사라지고 현상이 부질없어지는 체험에 익숙해진 그들은, 차차 춤(無)을 없음(無)으로 쓰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런 식으로 無(춤)의 가차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無가 '없다' 또는 '아니다(非, 不)'라는 뜻으로 차츰 변화해 가자, 그 원형의 반쪽을 살려서 舞가 만들어지고 그것으로 춤을 대신하여 가리키게 된다.

 

舞(춤 무)는 엇갈린 양발을 나타내는 舛(어그러질 천) 자, 그러니까 이리저리 방향을 다르게 틀어 느리게 또는 빠르게 움직이는 양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문에, 舞 자는 동작으로서의 춤사위를 가리키는 글자가 되었다.


한편, 無는 인간과 사물 간의 연결과 변화에 초점을 둔다. 無의 하단부에서 무당과 신대는 연결되고 합쳐져서 나무가 되고 우거진 숲(林)이 된다. 그것도 잠시 어느새 보이지 않는 에너지(灬(=火))로 화(化)한다. 아마도 갑골문의 그 무녀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녀는 신령이 자신에게 강림을 염원하여 격렬하게 춤사위를 벌였다. 그 한바탕의 춤사위로 마침내 신이 그녀에게 내렸다. 그 순간 그녀는 사라진다. 있어도 없고 없어도 있는 진여(真如)의 찰나!


변화한다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변화하는 것들은 그 전과 후를 함께 보아야 진정한 실재를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제약에 갇힌 인간들은 그와 같은 전일적(全一的)인 앎이 어렵기만 하다. 결국, 인간들이 아는 것이 아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변화하는 것, 그리고 없어지는 것, 현상을 부정하는 것, 그것들을 가리킨 글자가 無다.


우리가 접하는 종교(巫)와 예술(舞) 그리고 철학(無)은 다 제 각기 섞이지 않는 다른 이야기를 떠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인간들이, 각자의 '알 수 있는 만큼의 인식'과 '할 수 있는 만큼의 표현'에 의존하여 그것들을 설명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들의 주장이 사특하지만 않다면 기실은 그 모두가 실제의 드러난 한 부분을 말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긍극적으로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한자 無는 은연하게 그 사실을 드러낸다.


사족, 기독교 찬송가 457장,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 춤의 왕’은 예수와 그의 춤을 노래한다. 춤은 세상의 창조부터 영원까지 존재하고, 생명과 해방이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내가 네 안에 있는 경지로 춤은 우리를 인도한다.

결국, 우리는 겨우 진리의 끝자락 정도를 잡고 있으면서 이렇다 저렇다 하고 서로 죽일 듯이 분쟁하지만, 그것이 하나인 것의 그저 다른 모습일 뿐임을 사람들은 애써 외면한다. 그 모든 것이 백 가지의 너그럽고 분방한 춤(無)으로 일통(一通)하여 인생이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소망한다.

【 그림 】 나타라자아사나 - 춤의 왕 자세

힌두교 최고의 신 시바의 이름은 ‘나타라자’이다. 그런데, 그 뜻이 춤의 왕이다. 저 멀리 서역 천축국 인도 땅에 강림하신 시바님께서도 역시나 춤에는 일가견이 있으시다. 哈哈。


주) 1. 신대는(또는 신간) :  무속에서 신령이 하강하는  통로 또는 신령의 임재를 나타내는 나무. 내림대, 신장대, 성줏대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2. 무용(無用)과 무용(舞踊)이 단음 무용과 장음 무-용으로 구별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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