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춘하추동(春夏秋冬)
常(항상 상) : 尚(오히려 상) + 巾(수건 건)
전국(战国)시대나 소전(小篆)에서 常(항상 상)이 가리킨 것은 치마다. 자기 집에서 굳이 격식을 차려 옷을 입는 경우는 별로 없다. 혹여 무슨 행사라도 있다면 모를까…. 그러니 집안(尚)에서 천(巾) 한 장으로 하반신을 두르고 편하게 지내는 것은 흉이 아니다. 바로 그 모양이 常이다. ( 【 표 1 】 1, 2 )
상고시대에 중국 땅 화북지역은 그 기후가 지금과 달라서 열대에 가까웠다. 코끼리가 서식할 정도로 일 년 내내 덥고 습했다. 따라서 이 땅에 터 잡은 사람들은 사계절을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혹시라도 그런 개념을 가졌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면 그건 아마도 다른 지역 사정을 전해 들은 때문이리라.
그런 기후환경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常을 즐겨 입었을 것이다. 덥고 습한 데다가 그것도 집안에 머물러 쉬고 있을 때이다. 통풍성이 좋은 치마를 즐기지 않을 수가 없다. 남녀노소 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常이 집안에만 갇혀 있지를 않는다. 차츰 집 밖으로 행차를 시작한다. 거리에서, 장에서는 물론하고 밭이나 들에서까지 널리 퍼져 모두가 입는다. 그러자, 모양과 색깔이 다양해지고 장소에 상황에 따라서 격식과 문화가 생겨 난다.
치마는 면이 넓고 선이 길다. 한 폭의 그림을 옮기기에 적당하니, 꽃이 피고 나비가 날고 구름이 모여든다. 주름을 잡거나 굴곡을 놓으면 몸의 윤곽과 움직임을 따라 흐르고, 일렁이고, 펄럭이고... 기어이 패션(Fashion)이 된다.
어찌 천 조각(巾)이 어울릴 수 있겠는가! 급기야 제대로 만든 옷을 뜻하는 衣(옷 의)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글자가 裳(치마 상)이다. 그래서, 衣裳(의상)은 본디 아래위로 맞추어 짝으로 입는 옷이었다. 衣가 윗도리의 상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잘 갖추어 입은 옷의 뜻으로만 쓰인다.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한편, 그 쓰임새를 잃었지만 '치마'(常)는 폐기되지 않는다. ‘항상’, '일정하다' 또는 '변함없이'의 뜻으로 재활용된다. ‘치마’의 자리를 裳(치마 상)에게 넘겨주고, 집안뿐 아니라 집 밖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림이 없이 널리 입게 되니 그 가차된 뜻에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주 3)
뜬금 없이 든 생각 하나! 원래부터 일상이었던 것은 없다. 모든 일상은 변화를 거쳐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일상의 의미를 가벼이 볼 것이 아니다. 눈앞에 놓인 일상에 이르게 한 그 간의 변화에 감사하고, 그 일상이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을 예민한 마음으로 애정(愛情)해야 하겠다. 편편의 일상들이 한 폭의 아름다운 치마폭처럼 내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도록...!
사족, '춘추전국(春秋战国) 시대’라는 말에 포함된 '춘추(春秋)'는 약어(略語)가 아닐 수 있다. 그 시절쯤의 화북지역은, 봄은 더 따뜻하고 가을은 덜 시원한 데다가 그 기간까지 훨씬 길었을 테니, 딱이 여름과 겨울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열대기후는 일반적으로 연중 온도의 변화보다 습도의 변화가 훨씬 크다. 그래서, '우기'와 '건기'로 계절을 단순하게 나누기도 한다. 이것은 중국 화북지역의 상고시대를 춘추(春秋)라 부른 것과도 그 맥락이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사계절 한자들의 자형변천을 살펴봐도 그런 유추가 가능하다. 春과 秋의 갑골문은 계절적인 요소들을, 글자의 생김에, 매우 직접적으로 담고 있다. 春은 풀, 새싹(艸(풀)+屯(순)) 그리고 태양(日)이다. 만물의 소생과 생장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를 나타낸 것이다. 글자 그 자체가 딱 봄이다.
秋은 메뚜기와 불(火)이다. 추수할 곡식을 탐하여 몰려드는 메뚜기 떼를, 불을 놓아 쫓는 장면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절박했을 시절에 생계를 위해 분투하는 적나라한 삶이 글자 속에 그대로 들어 있다. ( 【 표 2 】 )
그러나, 夏(금문)과 冬(갑골문)은 이와 사뭇 대조적이다. 夏는 머리 부분을 크게 그려 강조한, 앉아 있는 사람이다. 황하가 북쪽 유역에 자리 잡았던 한족의 뿌리인 화하족(華夏族)을 뜻하던 글자다. 冬은 꼬임이 풀어지지 않도록 끝 부분을 매듭을 지은 새끼줄이었다. 계절을 끄집어 낼 실마리 조차도 찾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春이나 秋은 갑골시대 일찍부터 그대로 계절을 가리킨다. 그러나, 갑골문 夏와 冬은 사정이 다르다. 여름과 겨울을 가리키기 위해서 뜻의 가차와 자형변화가 불가피했다. 그 과정은 꽤나 오랜 세월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화북지역에 여름과 겨울이 뚜렷해지는 기후변화가 만들어질 만큼의 기나긴 세월...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글자의 뜻이 변해 가고, 또 그 뜻에 어울리도록 글자의 모양도 변형해 간다. 그 글자는 뜻이 널리 퍼지고 계속 원래대로 유지되게 해준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처럼, 뜻은 유전자이고 글자는 그 뜻을 지키고 퍼트리는 생존기계다. 그것들은 환경의 선택으로 얽히고 섥혀 변화한다. 생물의 진화 과정을 많이 닮아 있다. 哈哈。
주) 1. 像(모양 상)은 사람과 코끼리가 공존하는 장면이다. 현재는 사라져 볼 수 없지만 머릿속에 기억으로 남아서 그려지는 모습, 그것을 보통 像이라 한다. 그래서, 존재의 본질은 아니지만, 알 수 없는 실존의 겉으로 드러난 모양을 가리킬 때에 이 글자를 쓴다. 중국 장기판에는 한(漢)과 초(楚) 양편 모두에 코끼리(象)가 중요한 말다. 오래전 중국 대륙에서 코끼리와 인간들이 공존했다는 흔적들이다.
2. 사서 <춘추(春秋)>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여름은 봄에 들어 있고, 겨울은 가을에 들어 있다.' 이 말은 여름과 겨울이 따로 구분해서 존재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것들이 별도로 구분할 필요가 없을 만큼 계절적인 의미가 희박했다는 뜻으로 역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3. 常에 치마에서 항상으로 뜻이 변한 과정에 대해서, 집안에서 항상 입던 옷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집안 머물 때에 한정해서 시와 장소가 제한되어 있는데, 그것이 어째 '항상'으로 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집안에서만 입던 옷이 집밖으로 퍼져 나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게 되니 그때서야 常이 항상으로 의미로 쓰이게 되고, 치마의 의미로 혼용되는 동안 혼란이 생기니 裳이 만들어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늘 그렇지만 뇌피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