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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비 Dec 13. 2022

83타워와 E월드 그리고 두류공원

꽃나무에 꽃이 만개하고 겨울가지에 꼬마전구가 반짝이는 그곳

아마도 공원인 것 같다. 야외 매점 간이 의자 앞에서 빨대를 꽂은 콜라병을 들고 깨발랄하게 서 있는, 지금의 내 딸 또래의 여자 아이가 있다. 볼살이 통통하고 얼굴이 주홍빛이다. 전반적으로 주홍빛이 많은 걸 보니 해질 무렵인 듯하다. 몇 장의 사진이 죄다 주홍빛이다. 젊은 시절 더벅머리 우리 아빠와 백바지를 입은 우리 엄마도 거기 있다. 엄마는 아직도 이십 대, 아빠는 기껏해야 갓 서른이었을 시절이다. 아빠는 또 다른 사진에서 나와 사이좋게 솜사탕을 먹고 있었다. 사진 속의 두류공원은 너무 오래된 어린 시절이라 기억에 없지만, 오래된 앨범을 좀 더 들춰보면 가물가물 기억이 피어나는 사진 속의 두류공원들이 있다. 이번엔 남동생과 함께 두류공원의 팬지꽃밭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새옷 티가 역력한 투피스에 하얀 타이즈를 신고 삐삐머리를 야무지게도 묶은 나의 동그란 얼굴과 가지런히 자른 앞머리에 볼우물이 패인 남동생의 장난끼 넘치는 얼굴이 나란히 서 있다. 무더기무더기 피어난 개나리 속에 파묻힌 것처럼 찍은 사진도 있다. 만개한 봄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던 삼십대 초중반의 엄마의 낭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사진들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두류동은 아마도 두류공원이 끼고 있는 두류산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두류산 자체는 야트막한 동네 동산에 불과하지만, 두류공원은 대구에서 손꼽을 만한 큰 규모의 공원이다. 산을 끼고 있는 공원이라 탁 트인 대지가 없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봄이면 수령이 제법 오래된 벚나무들이 큰길을 따라, 공원 안길을 따라 만개했고 개나리가 풍만하게 피어 오르는 곳이었다. 거기 질세라 벚나무 아래 줄을 맞추어 심어둔 팬지의 앙증맞은 자태도 귀엽다. 우리 가족은 봄이면 사촌들과 함께 두류공원으로 향했다. 벚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엄마가 새벽부터 싸주신 김밥을 먹으며 봄꽃놀이를 즐겼다. 나무 뒤에 몸을 숨겨 술래잡기, 숨바꼭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했다. 그러니 초등학생 시절 해마다 소풍으로 간 두류공원은 지겨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안녕이라며 두류동을 떠난 지 십 년이 채 되지 않아 나는 다시 두류공원으로 향한다. 그때의 나는 2002년 한일월드컵을 맞이한, 두류공원 근처의 여고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오후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지만 그때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누구랄 것 없이 밖으로 뛰쳐나가야 하는 붉은 악마들이었으므로 나도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야자를 째고' 두류공원으로 향했다. 나는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야외음악당의 야외스크린을 통해 붉은 악마 한 마리가 될 수 있었다.



야외음악당은 두류공원에 연계된 대구의 몇 안 되는 유명지 중 가장 늦게 조성된 곳으로, 대구 치킨의 무덤이기도 하다. 너른 잔디밭의 가장 저지대이자 꼭짓점에 큰 무대가 조성되어 있다. 무대 앞 좌석은 물론 잔디밭에서도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제목 그대로 야외 음악당이다. 그러나 야외음악당을 찾는 사람들은 음악보다는 이곳의 푸른 잔디와 탁 트인 높은 하늘을 사랑했으며, 너도나도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대한민국 치킨의 총본산인 대구의 치킨을 주문했다. "야당 갈까?" 한 마디에 친구들과 함께 이 곳에 도착해서 잠시 서성이고 있으면 치킨 가게 사장님이 전단지를 빈 손에 쥐어 주셨다. 여기서 치킨을 주문하면 돗자리는 덤으로 딸려 왔다. 야외음악당은 젊다 못해 어린 어른 또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젊은이들의 헌팅 성지가 되었다. 인스타그램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는 체크 무늬 돗자리나 라탄 바구니, 예쁜 병음료를 갖춘 피크닉세트와 함께 사진 명소가 되기도 했다. 코로나 직전까지는 반려동물 - 정확히는 반려 강아지들의 성지가 되기도 해서 동물 포비아가 심한 나는 도저히 가지 못할 곳이 되었다. 대구는 코로나19가 가장 심각했던 곳이었으므로 한동안 이곳의 잔디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쑥쑥 자랐을 것이다. 최근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헌팅 성지이자 인스타그램 사진 명소이자 반려인들의 천국이라는 그 모든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지 않을까? 대구라는 좁은 우물 속에서만 산 나에게 두류공원의 야외음악당은 한강 둔치 부럽지 않은 곳이었다.


산책로와 꽃나무만 즐비하던 두류공원은 1990년대 대구타워가 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대구타워는 단박에 대구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별다른 고층건물이 없는 대구의 스카이라인 한가운데 우뚝 섰다. 칠곡에서의 10개월을 제외하면 두류공원을 끼고 있는 달서구를 떠난 적 없었던 나는 언제나 우리 집에서 대구타워를 볼 수 있었고 어린 마음에도 대구타워가 비치는 야경은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나의 어린 가슴을 가장 뛰게 만드는 것은 대구타워 바로 옆에 조성된 우방랜드였다.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우방랜드에 간 날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10살 또래들보다 훨씬 키가 컸던 나는 아직도 우방랜드(현 이월드)에서 가장 짜릿하고 무서운 롤러코스터인 부메랑을 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또래들과 함께 타는 범퍼카나 바이킹 제일 앞줄은 눈에 차지 않았고 곧장 새빨간 롤러코스터인 부메랑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이월드의 부메랑을 탈 수 없었다. 가벼운 트라우마를 겪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방랜드에는 부메랑 말고도 재미 있는 놀이기구들이 많았다. 재미있기보단 낭만적인 회전목마도 그렇고 범퍼카나 탬버린, 바이킹, 캉캉, 후룸라이드(물배), 카멜벡 등등을 섭렵했다. 놀 곳 없는 대구에서 놀거리 없는 청소년기를 보낸 나에게 우방랜드는 소중한 곳이었다. 그건 나와 함께 우방랜드로 향했던, 두류공원에서 함께 꽃놀이와 술래잡기를 하던 사촌들, 남동생,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제 다섯 살이 된 딸아이와 함께 이월드(그때의 우방랜드)에 가 보니 그때의 우리 부모님께도 우방랜드는 소중한 곳이었을 듯하다. 딸아이가 나도 무서운 후룸라이드를 몹시 즐거워하며 한 번 더 타자고 우리를 졸랐기 때문이다. 무지개빛 솜사탕을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다 작은 손에 쥐어줬을 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기 때문이다. 회전목마 앞에서 사진을 찍는 그녀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온종일 피로한 줄도 모르고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에서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이 천사보다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아마 그녀는 모를 테지만 그녀는 이미 이월드 옆의 83타워(그때의 대구타워)에 여러 차례 온 적이 있다. 83타워와 이월드는 나란히 연결되어 있으며 진입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두류산을 깎아 만든 이월드라 자연히 경사가 있는데 위를 향해 계속 올라가면 여러 군데에서 타워 진입로를 확인할 수 있다. 타워에서 이월드로 들어가는 길은 티켓 확인이 필요하지만 반대 방향은 자유다.  숨을 헐떡이며 타워 진입로 끝까지 올라가면 83타워가 우뚝 서 있고 너른 야외 로비가 펼쳐진다. 빨간 2층 버스, 자이로드롭, 조금은 조악해 보이는 포토존 - 나름 친절하게 핸드폰 거치대까지 있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단체사진을 찍을 수 있다. - 이 군데군데 서 있다. 숨을 헐떡이며 올라 온 보람이 있으므로 여기서 바라보는 전망도 나름 근사하다. 그러나 83타워에서 가장 근사한 시절은 바로 벚꽃이 만개한 봄이다. 특히 이월드 주차장에서 83타워로 바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쭉 서 있는 벚나무는 수령이 오래 되어 꽃잎이 풍만하고 아름다우며 바람이 불어 낙화하는 시절을 잘 맞추면 흐드러지게 내리는 꽃비를 맞을 수 있다. 딸아이는 이 길을 나와 함께 걸으며 "봄이 내린다"고 말한 것을 저는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시즌에는 푸드트럭도 등장한다. 한창 바깥나들이 하기 좋은 날씨에 실컷 꽃비를 맞고 주전부리를 우물거리면 그때만은 이곳이 별천지다. 차가 좀 밀려도 대구 어디에서든 멀지 않고 주차장이 넓으며 주차장을 따라 올라가는 길, 이월드 안, 타워 전망대 로비, 두류공원 안길 등 벚꽃놀이를 즐길 곳들이 분산되어 있으므로 큰맘먹지 않고 부담없이 봄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서, 유모차에 실리거나 아빠 어깨에 무등을 타고, 심지어 엄마 뱃속에서도 83타워의 벚꽃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이제 좀 컸다고 벚꽃보다는 닭꼬치와 지팡이 아이스크림, 솜사탕 따위가 더 좋겠지만 이또한 봄을 즐기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니 벌써부터 풍류를 터득했다고 해 두겠다.


그때의 대구타워는 지금 83타워가 되었다. 꼭대기 층이 83층이라서 그렇다는데, 예전의 대구타워라는 이름에 비하면 많이 아쉽다. 그때의 우방랜드는 지금 E월드가 되었다. 낭만 없는 이름인 것은 매한가지이나 대전의 O월드와 좋은 짝이 될 것만 같다. 그러나 야외음악당을 만들고 83타워를 만들었으며 E월드를 만든 두류산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사계절을 품으며 우리를 환영한다. 다른 지역에는 첫눈이 내렸다는 지금은 꽃잎도 단풍도 모두 떨어진 자리에 겨울눈만 꼭꼭 내려앉은 앙상한 겨울가지 위로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지는 때이다. 아이의 붉은 볼을 마스크로 꽁꽁 싸매고 반짝이는 야경을 구경하러 갈 때가 되었다.





그녀는 뱃속에서부터 두류공원이 품은 83타워의 꽃놀이를 즐겼다. 그녀가 태어나기 한 달 전, 83타워 앞에서.



E월드 주차장에서 83타워로 올라가는 길은 때를 잘 맞추면 꽃비가 내리는 장관을 볼 수 있다.




꽃놀이와서 식도락을 즐기게 된 그녀. 푸드트럭에서 산 지팡이 아이스크림은 녹아도 먹기 좋았다.



E월드에서. 수양벚나무와 그 뒤로 비치는 두류산, 성당못. 통칭 두류공원 경치가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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