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왜 이렇게 한 줄도 못 써?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라서.
본인이 지금 여기 왜 와 있는지 본인이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아, 그럼 이유라면 역시 태어났기 때문에. 라텍스 장갑을 낀 손에 다리가 잡혀 강제로 세상에 끌려 나왔기 때문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P100
상담 마지막 날, 닥터 장이 말했다.
네 인생이 죽은 아이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덤인 것마냥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든, 내 명함을 주면서 여기로 전화해보라고 해. 욕을 실컷 해 주지.
그 제안을 실행에 옮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닥터 장의 말대로라면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마주친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명함을 나눠 줘야 했다. 친구들과 선생님, 경비 아저씨, 슈퍼마켓 주인,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나를 모르는 행인들에게.
무엇보다도 매일 아침 일어나는 나 자신에게도 여기에다 전화를 해 보라고 해야 했다. P96-98
K: 이해가 안 가. 저걸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일부러 먼 매점에까지 달려가서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온다는 게. 어떻게 저렇게들 열심일 수 있을까? 저건 너무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잖아. 창피하게.
얼마 뒤, 친구들과 핫도그를 사 먹고 오는 길에 멀리서 K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숨어 버렸다.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P54-55
고작 공기 중에 날리는 꽃가루 때문에 봄마다 이런 굴욕감을 맛보아야 한다…… 반듯하게 있어야 할 염색체 몇 번이 살짝 어긋나는 바람에…… 인간의 생명을 결정짓는 건 이렇게나 사소하고 시시한 것들. 위대하고 고귀한 것은 어디에 있지? P64
넌 정말 행운아야.
그렇다면 그때 교실에 남아 있던 다른 열여덞 명은 죽으라는 운명의 뜻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운명이란 혹시 하느님의 세속적인 이름? P66
심한 꽃가루 알레르기로 발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 메모를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게 너무 창피해 몇 번은 심하게 구겨서 버리기도 하고, 비행기 모양으로 접어 쓰레기통으로 날려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예 찢어 버릴 수는 없었다.
하여튼, 되게 살고 싶어 한다니까. P79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기에 사는 동안 언젠가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된다. 동화의 세계를 벗어나 소설의 세계로 진입한 예민한 시기에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질문하게 될 것이고, 해답을 찾든 못 찾든 어느새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될 것이다. 질문에 무디어지는 것을 성장이라 한다면 사람들 중에는 평생 성장하지 않고, 질문을 반복하는 바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작가라고 부른다. P140
오세란(청소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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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번외』, 사계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