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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othing Jun 21. 2023

회색 하늘에 수놓다

햇귀가 밝아오기 전 새벽은 먹물을 풀어놓은 듯 어슴푸레하다. 적막하고 쓸쓸하고 갑갑하다. 마치 종말의 마지막 날이 밝아오는 것만 같다. 누군가는 희붐하게 밝아오는 먼동에 온 대기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고 한다. 또는 천천히 스며드는 해의 빛깔에 경탄하기도 한다.

우리가 보는 하늘이 같은 색이 맞을까?




그 누군가에게 새벽은 오늘의 시작이다. ‘시작’이라는 단어는 경쾌하고 밝고 설렌다. 나에게 회색 하늘은 손에 잡히지 않는 오늘의 마침이다. 허무하고 음울하거나 후련한 느낌의 ‘마침’. 까만 어둠이 회색으로 바림질 되는 것을 목격했다면, 그날은 잠을 자지 못했다는 까닭에서다. 이따금 형체 없는 불안이 온몸을 꽁꽁 묶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다. 몸을 결박한 불안은 귓구멍을 타고 머릿속에 침투해 이것저것을 죄다 꺼내 놓는다. 아침을 차리다 깨져버린 그릇. 한심하게 쳐다보는 아빠의 성난 얼굴. 상차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나는 구제불능이야. 유람선의 화기애애한 사람들. 술에 취해 토를 하는 엄마. 엄마가 죽어버릴 것 같아 불안에 떨며 우는 나. 작아진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눈빛. 너 참 유난스럽다. 내가 유난스러운가? 엄마가 저렇게 괴로워하는데 왜 모두들 웃고 있는 거야? 탁-탁-탁-탁-. 좁은 골목길을 뛰어가는 발소리. 체육복 바지가 엉덩이 반절을 흘러내려가고 있지만 무조건 뛴다. 흘금 돌아본 골목 어귀엔 커다란 개가 쫓아온다. 콰당탕. 날이 선 철문을 세게 닫고 집에 들어가 전화기를 붙든다. 엄마, 나 무서워. 너는 나이가 몇인데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해? 엄마 바빠. 끊어. 문득 둘러본 집안은 실금 같은 빛줄기도, 한 줌의 온기도 없다. 그런가? 내가 무서워하는 게 이상한 건가? 나는 구제불능이 맞나 봐. 구제불능은 자라서 구제불능이 된다.




어떤 밤에는 누구나 겪었을 만한 일상들이 흉기가 되어 나를 난도질한다. 시트콤이 공포물이 되기에는 개연성도 없고 구성도 허술하다. 그럼에도 비끄러매지는 날이면 속절없이 웅크려 고롱고롱 앓는다. 서른이 넘은 지 좀 되었지만 가끔 찾아오는 고난의 밤에는 어렸을 때 생각이 자꾸 난다. 지금의 나를 이룬 말랑말랑한 진흙 아이. 물을 묻혀 토닥토닥 쓰다듬고 어루만져 빚었어야 하는데, 대강 뭉터기로 쌓고 고온에 잽싸게 구워버려 쩍쩍 금이 간 도자기가 되어버렸나 보다.




피로하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남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혼자 뒤처지고, 외롭고, 아픈 마땅한 근거가 필요했다. 찾아야만 했다. 자글자글한 뇌주름 사이에 들어가 있는 작은 파편들을 침 묻힌 손가락으로 찍어 꺼내왔다. 매를 맞고 울다 잠든 종아리에 닿는 축축하고 거친 손길. 아빠가 연고를 발라주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친척들과 함께 놀러 간 인천 바다. 유람선. 흥에 겨워 처음으로 과음한 엄마. 삼촌이 겁먹은 나를 달래려 볼을 꼬집고 마구 놀린다. 커다란 집에 덩그러니 앉아 공포를 삼키던 그날. 엄마의 연락을 받고 집에 돌아온 언니. 무심하게 식빵에 잼을 발라주던 언니의 뒷모습. 키는 엇비슷했지만 방바닥에 길게 늘어진 언니의 그림자가 꼭 거인 같다고 생각했다.




면밀히 살펴보고 들추지 않으면 발바닥의 모래처럼 하찮아지는 기억들이 있다. 불행한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막 쪄낸 호빵처럼 따끈한 순간들도 적지 않다. 세상을 조금 비뚤어지게 바라보는 나는, 기록을 하기 시작했다. 나쁜 감정을 쏟아내고 그 줄기를 따라가는 일. 참과 거짓과 모순을 발라내어 감정을 정리하는 일. 나를 돌보는 일.




회색 하늘은 아직도 적막하고 쓸쓸하지만, 갑갑하지 않다. 어둠과 밝음 사이. 누군가는 잠들고 누군가는 깨어날 시간. 그 모호함이 나와 비슷하다. 음울한 하늘에 내 이야기를 수놓는다. 연회색 피륙에 검은색 실로 가득 메우고, 군데군데 은빛 금빛의 작은 나비들도 수놓는다. 어둠 속 작은 반짝임에 집중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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