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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othing Jun 02. 2023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번외

1. 그날 이후 담임은 조퇴증을 쉽게 끊어 주었다. 수위 아저씨가 지키는 교문을 나서는 순간,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조퇴 취소 확인증 같은 건 없으니까 그대로 나온다.


2. 공사장 앞에서 인부들을 구경하며 서성인다. 어느 인부 아저씨가 '그 학교' 학생이 맞나며 묻는다. 바쁜 공사장에서 무려 3분이나 할애해 모두가 추모를 했다고 한다. 힘들어 보여 밥을 사주고 싶지만, 네가 탈 버스가 왔으니 가라며 인사를 한다.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탄다.


3. 내가 탈 버스가 아니었다. 버스에서 나이 든 승객이 벨을 눌러달라 하여 눌렀지만, 내릴 곳이 아니라며 모른 채 한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내가 내린다.


4. 지나가던 아이가 토끼 풍선을 놓친다. 풍선을 잡으려 손을 뻗는데 지나가던 택시가 선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탄다. 택시 기사에게 풍선을 잡으려 했다고 하자, 풍선을 찾게 해 준다며 출발한다.


5. 택시는 동물원 앞 풍선을 파는 매대에 내려준다. 풍선을 사서 다시 하늘로 띄워 보낸다. 앞에 있는 동물원에 입장한다. 구경하던 노부부가 작은 똥을 싸는 염소로 태어나고 싶다고 한다. 남편에게 자신의 기저귀 가는 것을 맡기는 게 미안한 까닭이다. 내게 '그 학교' 학생이 맞냐고 묻는다. 고귀한 생명에 대한 추모를 했다고 한다. 겨우 똥을 치우는 문제 때문에 염소로 태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인간인데, 인간이 고귀한 것인가?


6. 열 살 때, 이 동물원으로 소풍을 왔다가 버드나무와 소나무 아래서 알레르기 발작을 일으켜 응급실에 실려갔었다. 의사는 호흡 곤란과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그 버드나무와 소나무 근처로 간다.


7. 깨어보니 병원이다. 의사가 '그 학교' 학생이 맞냐고 묻는다. 어쩐지 교복을 보고 반드시 살려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학교 학생이 아니라면 죽어 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한 걸까? 병원에서 요구하는 인적사항 작성을 거부하고 진료비도 내지 않은 채 뛰쳐나온다. 어느새 경찰이 쫓아와 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경찰이 이름을 추궁한다.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말한다.


아, 그 학교 학생이구나.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너구나.


나는 K가 벌인 총기 난사 사건 당시 유일한 생존자다. 동물원으로 소풍 가는 날, 각자의 사정으로 열외 되어 학교에 모여있던 열여덞 명의 학생들과 선생님이 죽었다. 병원 측은 이런 사항을 고려해 사과문을 쓰면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주겠다고 한다. 나는 진지하게 사과문을 쓴다.


왜 이렇게 한 줄도 못 써?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지 몰라서.

본인이 지금 여기 왜 와 있는지 본인이 가장 잘 알 거 아니야?

아, 그럼 이유라면 역시 태어났기 때문에. 라텍스 장갑을 낀 손에 다리가 잡혀 강제로 세상에 끌려 나왔기 때문에.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P100


사회는 희생자를 애도한다. 선량하지만 불가피하고, 어쩌면 당위적인 것에 불과한 애도는 생존자를 이방인으로 만드는 걸 수도 있다. 심지어 나조차도. 스스로를.


상담 마지막 날, 닥터 장이 말했다.

네 인생이 죽은 아이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덤인 것마냥 얘기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든, 내 명함을 주면서 여기로 전화해보라고 해. 욕을 실컷 해 주지.

그 제안을 실행에 옮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닥터 장의 말대로라면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마주친 모든 사람들에게 일일이 명함을 나눠 줘야 했다. 친구들과 선생님, 경비 아저씨, 슈퍼마켓 주인,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나를 모르는 행인들에게.
무엇보다도 매일 아침 일어나는 나 자신에게도 여기에다 전화를 해 보라고 해야 했다. P96-98


'나'는 사건 전후를 회상하며 존재와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번뇌한다.


K: 이해가 안 가. 저걸 안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일부러 먼 매점에까지 달려가서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온다는 게. 어떻게 저렇게들 열심일 수 있을까? 저건 너무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잖아. 창피하게.

얼마 뒤, 친구들과 핫도그를 사 먹고 오는 길에 멀리서 K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숨어 버렸다.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P54-55
고작 공기 중에 날리는 꽃가루 때문에 봄마다 이런 굴욕감을 맛보아야 한다…… 반듯하게 있어야 할 염색체 몇 번이 살짝 어긋나는 바람에…… 인간의 생명을 결정짓는 건 이렇게나 사소하고 시시한 것들. 위대하고 고귀한 것은 어디에 있지? P64
넌 정말 행운아야.

그렇다면 그때 교실에 남아 있던 다른 열여덞 명은 죽으라는 운명의 뜻이었을까요? 그리고 그 운명이란 혹시 하느님의 세속적인 이름? P66
심한 꽃가루 알레르기로 발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 메모를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게 너무 창피해 몇 번은 심하게 구겨서 버리기도 하고, 비행기 모양으로 접어 쓰레기통으로 날려 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예 찢어 버릴 수는 없었다.
하여튼, 되게 살고 싶어 한다니까. P79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태어나고 존재한다. 죽음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고된 아침을 맞이하고, 어쩔 수 없이 음식을 씹어 삼키고, 어쩔 수 없이 몸과 머리를 혹사시키고, 어쩔 수 없이 웃음을 짓거나 열을 내고, 어쩔 수 없이 너무 짧거나 기나긴 밤을 보내고….

어쩔 수 없이 '잘'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혹은 어쩔 수 없이 낙담하기도 한다.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은 미미하다. 삶과 죽음의 의미도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위 행위들이 하여튼, 되게 살고 싶어 한다는 걸 입증한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책 말미에 쓰인 평론가님의 말이, 시끄럽고 캄캄한 내 세상을(그리고 나와 비슷할지 모를 당신의 세상을) 조금은 버젓하고 당당하게 만들어 주었기에 첨언한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기에 사는 동안 언젠가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된다. 동화의 세계를 벗어나 소설의 세계로 진입한 예민한 시기에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질문하게 될 것이고, 해답을 찾든 못 찾든 어느새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될 것이다. 질문에 무디어지는 것을 성장이라 한다면 사람들 중에는 평생 성장하지 않고, 질문을 반복하는 바보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작가라고 부른다. P140  

오세란(청소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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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번외』,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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