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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othing Aug 03. 2023

비 내리지 않는 장마철

엽편소설

[폭우가 예상되니 주변 위험지역 접근, 통행 및 외출 자제 등 안전에 유의 바랍니다.]


 운은 며칠째 휴대전화에 울려대는 알람을 확인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희미한 해가 스러지는 검푸른 하늘에는 습기를 머금은 쌘비구름이 수직으로 치솟아 있었다. 무리에서 떨어진 작은 새의 날갯짓에도 폭우를 쏟아낼 것만 같은 축축한 적란운이 장마철을 증명하였지만, 아직 비가 내리지 않는다.


‘오늘은 비가 많이 오는데 여러분이 계신 곳은 어떤가요? 저는요, 비가 많은 것을 씻어준다고 생각해요. 잎사귀에 쌓인 먼지들, 아스팔트 위에 붙은 열기들, 움푹 파인 땅에 고인 오수들. 비록 날이 개면 다시 쌓일지언정 비 오는 순간은 어떤 후련함이 느껴져요.’


 살짝 열린 방문 틈으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여느 때와 같이 로가 라디오를 듣다가 졸고 있는 듯했다. 로와 운이 말을 섞지 않은 지 꽤 되었는데, 어떤 일 때문에 다투었는지 언제부터였는지 운은 기억하지 못한다. 같이 산 지 오 년쯤 되었을 무렵 사소한 일로 자주 언쟁이 오가긴 했었다. 대학 때부터 예민한 취업 생활을 거칠 때까지, 무던한 성격을 가진 둘의 집엔 천변은커녕 돌개바람이 부는 날조차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취업에 성공하여 진정한 사회인의 궤도에 들어섬과 동시에 이따금 외풍이 불어 닥쳤다. 그날의 고단함과 짜증 섞은 볼멘소리로, 겨우 잇새로 새어 나오는 말들로 켜켜이 쌓아 올린 그들의 모래성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실에서 로의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요즘 로는 고양이처럼 낮에는 거실에 나와 볕을 쬐며 웅크려 있다가 밤이 되면 작고 네모난 상자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직장도 그만둔 듯 밖에 나가는 법이 없었다. 언젠가 직장을 관두면 세계 여행을 할 거라고 떠들어대던 로의 상기된 얼굴이 불과 일 년 전이다. 지금과 달리 그때의 칠월엔 비 소식 없이 연이은 열대야가 계속되었다. 에어컨의 찬바람이 지겨워졌을 때, 그들은 주말이 시작된 밤에 한강으로 향했다. 탁 트인 갈맷빛 밤의 소란스러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슬며시 훑고 지나갔다. 퇴사 후 세계 여행 계획, 캔맥주와 병맥주 간 신선도에 대한 토론 등 장대하거나 사소한 이야기들로 미지근한 밤을 보냈다. 운은 그날 밤 설탕에 절인 방울토마토처럼 발갛게 무르익고 노곤해진 로를 떠올렸다. 그 여름밤에 쏟아낸 말들이 텅 빈 검은 하늘에 콕콕 박혀 별자리를 이룬 듯했다.

 방문 닫히는 소리를 듣고 운이 거실로 나왔다. 최대한 로와 마주치지 않으려 하다 보니 달빛을 받아야 활동을 시작하는 올빼미가 되어버렸다. 커튼을 치지 않은 베란다 너머로 완연한 어둠으로 변해가는 하늘이 보였다. 아직 내리지 않는 비가, 그런데도 눅진한 날씨가 애처롭게 느껴졌다. 커다란 빗방울들이 애먼 구름을 꽉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빗방울 입장에서는 까마득한 바닥으로 제 몸을 날리는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방금 들은 노래는 Bruno mars의 It will rain이었습니다. 네가 가버린다면 매일매일 비가 올 거야. 저는 비 오는 날이 상쾌하게 느껴지는데, 노래 가사처럼 누군가에게는 슬픈 날일까요? 닿지 않는 모든 분이 장마 동안 비와 함께 모든 고뇌와 슬픔이 씻겨나가기를, 우중충한 날들 속 약간의 암울함을 즐기시기를 바라요. 맑은 날은 분명히 되돌아올 테니까요. 그럼, 노래 한 곡 더 듣고 올게요.’


 디제이 말마따나 차라리 비가 쏟아진다면 시원하기라도 할 텐데. 운은 불안을 가득 품은 검은 하늘을 보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베란다 창문 가까이에는 널브러진 홑이불과 작은 쿠션이 로의 둥지처럼 깃들어 있었다. 비록 다리를 접어야 하지만, 대강 누울 수 있는 소파를 놔두고 베란다 바닥에 옹송그린 채 창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볼 로가 귀엽기도 하였고 딱하기도 했다. 로가 왜 회사를 그만둔 걸까, 그간 모은 돈으로 세계 여행은 어려워도 제주도 정도는 갈 수 있지 않을까,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하더니 본인이 고양이가 되려는 것일까, 밖에는 왜 나가지 않는 걸까. 운은 로의 둥지를 개켜놓으며 고심했지만, 답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얇은 나무 문 하나만 열고 들어가면 이러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로의 방문은 거대한 둑과 같이 느껴졌다. 둑을 허물면 만유의 물들이 쏟아져 로를 휩쓸어 갈 것 같기도 하였고 쩍쩍 갈라진 메마른 땅 위의 탈진한 로를 볼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오지 않는 비 대신 찬물로 세수하고 나니 개운하게 느껴졌다. 잠 동안 묻은 먼지와 피부에서 차오른 기름, 옅게 남아있는 잔몽이 모두 씻겨 내려갔다. 디제이가 말하는 후련함이란 이것과 비슷한 느낌이겠지. 운은 몇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본 염을 떠올렸다. 하다못해 사람이 죽어도 시체를 닦는 염의 과정이 있으며, 망자가 이승에서 맺힌 원한이나 아쉬움을 씻겨주는 씻김굿의 행위도 있다. 이미 죽은 시체와 존재를 입증할 수 없는 영혼을 씻긴다는 건 살아있는 사람의 자기만족이 아닐지, 오물 묻는 시체도 결국 태워지거나 흙 속에 묻힐 것이며 영혼 혹은 영혼에 대한 죄책감이나 부채감도 언젠가 사그라들 텐데 후련함 뿐일 감정을 위해 참 쓸모없는 곳에 시간과 여타 자원들을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앗, 차가워!"

 "그러길래 왜 배를 조몰락거려."

 운의 무릎에 누워 시집을 읽던 로가 잠시 오수에 빠진 주말이었다. 잠결에 뒤척이며 운의 배를 간질이는 바람에 머금던 아이스커피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꿈속에서 폭신폭신하고 거대한 찐빵을 만지는 꿈을 꾸었는데, 그게 네 뱃살이었나 봐"

 둘은 가을바람에 부대끼는 갈대들처럼 한바탕 웃었다. 그날은 지나가는 가랑비가 열기를 거두어 가던 초저녁이었고 터진 홍시 같은 노을이 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티슈로 젖은 시집을 꾹꾹 눌러 닦던 운이 새 시집을 주문하겠다고 하자, 이미 여러 번 읽어 머릿속에 다 들어가 있다며 시집을 치우던 주황빛 저녁이 명징하다.

  운은 테이블 위에 우그러진 채 입을 벌리고 있는 시집을 집어 들었다. 책장 깊숙한 곳 또는 분리 배출된 쓰레기와 함께 이미 흙 속에 있어야 할 시집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 의아했다. 당시에 마침 같은 시집이 표지를 달리해 재출간하여, 새로 구매해 줬었던 까닭이다. 운이 상념 하는 사이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추었고 디제이가 말하기 전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빗줄기가 더 굵어지네요. 평소에 돌보지 못했던 가족이나 지인에게 안부를 전해 보는 건 어떨까요? 사람은 종이와 같아서 쉽게 구겨지는데, 오늘 같은 날은 습기를 머금어서 젖어버리거나 찢어질 수 있으니깐요. 연락이라는 것은요, 또는 함께 있어 주는 것은요, 젖은 종이를 따뜻한 바람으로 말려주거나 찢어진 종이를 테이프로 붙여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저에겐 언제나 옆에서 지탱해 주는 한 사람이 있는데요, 사실 청취자도 그 사람 한 명뿐이고요. 말하려니 부끄럽네요. 로야,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생일 축하해.'


 이 말을 끝으로 다른 라디오들과 달리 광고도, 마무리 멘트도 없이 뚝 끊겼다. 운은 그제야 종종 라디오를 틀거나 음악을 듣던 동그란 모양의 AI 스피커를 쳐다보았지만 충전하지 않은 지 오래인 듯 전원이 꺼져있었다. 디제이의 목소리는 운 자신의 음성과 닮아있었다. 그날의 흔적으로 오염된 낡은 시집과 본인 음성으로 녹음된 라디오, 서로의 방문을 열지 않는 간극에 커다랗고 검은 구멍이 뚫려있다는 게 여실해진 지금, 운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운이 박차고 일어난 자리에 시집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침대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23년 7월 23일. 알고 있던 날짜와 동일하다. 시간이 뒤틀리거나 미래 또는 과거로 이동한 것 같지는 않다. 길고양이 사진을 프로필로 걸어둔 로의 메시지를 찾아 손가락을 놀렸다. 마지막 메시지는 6월 6일. 로가 몇십 통이나 보낸 메시지가 홀로 탑을 쌓고 있었다. 어디야? 왜 전화 안 받아, 운아, 나들목 교차로 지났지? 거기 큰 사고 났다던데 너 어디야, 제발, 운아 아니지?

 왜 아니라고 답변하지 않았을까? 그날 운은 고된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업무 특성상 모든 공휴일에 쉬지 않는 터라, 혼자 있을 로가 신경 쓰였다. 회사 근처에 오픈한 디저트 가게에서 로가 좋아하는 에그타르트와 크레이프를 사서 가는 참이었다. 비가 와서 길이 어두웠지만 충분히 서행했었고…. 집에 와서 로와 타르트를…. 먹었는지 머릿속이 암전 된 것처럼 까마득하다.


 운은 로의 방으로 달려갔다. 쾅쾅쾅. 떨리는 주먹으로 방문을 여러 차례 내려쳤지만, 둔탁한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다. 금기와 같던 로의 방문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낡은 경첩이 내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벌어진 틈으로 이불을 덮고 누운 작은 몸이 보였다. 방안에는 회색 먹구름이 천장을 메우고 있었고 가늘게 내리는 비가 잠든 로를 적시고 있었다. 운은 로를 향해 손을 뻗으며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차가운 비가 보호막처럼 운을 튕겨냈다. 거실 끝에서부터 내달려 로의 방으로 뛰어들었지만 내쳐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운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뛰어들었다. 튕겨 나와 머리가 테이블에 부딪혀 찢기고 벽과 바닥을 구르며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로의 방안에 내리던 가랑비는 굵은 작달비로 변해 로의 침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운이 다가갈수록 어디선가 불어온 세찬 바람이 파도를 만들어 로의 위를 범람했다. 몽중의 로는 몇 번이나 물을 먹고 괴로워하며 거친 숨과 기침을 내뱉었다. 어느덧 불어난 물이 로의 얼굴 밑에서 참방거렸다. 운은 땀과 피가 뒤섞인 얼굴로 문 앞에 주저앉았다가 베란다로 천천히 걸어갔다.


 하늘에 산란하던 조개구름이 어느덧 비구름에 달라붙어 거대한 암운이 깔렸다.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것 같았다. 로가 세상의 모든 비를 가져간 까닭에 구름이 까맣게 그을린 채로 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것일까. 어떠한 인력 때문에 세상에 비가 내리지 못해 로의 방을 적시고 있는 것일까. 운이 손을 뻗어 구름을 움켜잡을 듯 허공을 쥐어 돌렸다. 운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까만 구름이 뱀과 같이 꾸물거리며 이동했다. 운이 두 손을 모두 올리고 허공을 가슴으로 끌어당기자, 먹구름이 베란다 앞까지 구름길을 만들었다. 운은 베란다 창문을 열고 검은 구름 위에 올라탔다. 그 순간, 운의 몸이 투명한 액체로 서서히 변하더니 수억 개의 빗방울로 흩어져 구름으로 스며들었다.







 [7월 24일 오늘의 날씨입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오늘 새벽을 기점으로 전국에 호우 주의보가 내려졌으며 당분간 장마전선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피해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요구되며……]


 로는 장대비가 들이닥치는 베란다 창문을 닫고 바닥에 떨어진 낡은 시집을 주워 소파에 앉았다. 운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좋아 시를 낭독해 달라고 조르곤 했는데, 생일 선물로 시 낭독과 그럴듯한 멘트로 만든 라디오 방송이 담긴 음성 파일을 받았다. 뉴스로 어지러운 티브이를 끄고 태블릿에서 운의 라디오를 틀었다. 그립고 부드러운 운의 목소리가 가슴을 간지럽힌다. 간밤에 운과 한강을 따라 걷기도 하고, 여유로운 주말 저녁에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꿈을 꾸었다. 매일 밤 꿈속에서 웅크려 우는 로를 방문 밖에서 쳐다보던 퀭한 낯빛과는 다른 밝은 얼굴이었다. 억수가 쏟아지는 거친 빗소리와 운의 아늑한 음성이 어우러져 황량한 거실을 맴돌았다. 머지않아 끝이 날 장맛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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