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과 함께 찾아온 재즈
오늘은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짧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OST 장면 하나를 보여드릴 테니, 오늘 레터의 주인공을 나타내는 캐릭터를 한 번 찾아보세요! 영상 속에서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는 캐릭터들을 주의 깊게 봐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3CG-8dOgCpA
이번 글은 특별하게 음악으로 시작해보았는데요, 이 노래는 동화 ‘개구리 왕자’를 기반으로 제작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공주와 개구리>의 OST*예요.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셨나요? 트럼펫이 춤을 추는 듯한 재즈풍의 선율, 그리고 인물들이 구사하는 자유로운 기교가 너무나도 아름답죠. 이처럼 영화 <공주와 개구리>에 등장하는 재즈풍의 OST들은 재즈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컨셉임을 알려주고 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애니메이션 속 재즈가 흘러나오는 장면에는 악어 루이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해요. 루이스는 재즈를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트럼펫 연주를 즐기는 캐릭터죠. 트럼펫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재즈 뮤지션이라,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요? 평소 재즈에 관심이 있던 플로터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 것 같은데요, 맞아요, 바로 루이 암스트롱이죠! 영화 속 재즈 뮤지션으로 등장하는 악어 루이스는 사실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을 모티브로 탄생한 캐릭터거든요. 심지어 <공주와 개구리>의 또 다른 OST ‘When We’re Human’ 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며, 루이스와 루이 암스트롱 사이의 연결고리를 암시하죠.
이 밖에도 영화 <공주와 개구리>에는 재즈에 관한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어요. 그렇다면 디즈니는 재즈의 어떤 매력에 빠져 영화의 메인 테마로까지 재즈 장르를 차용하게 된 걸까요? 그 매력을 파헤쳐 보고자 오늘은 재즈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음악이고 또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은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알아볼까 해요.
*OST : Original Sound Track의 약자로, 영화나 드라마 등에 사용되는 음악을 뜻함.
오늘 글은 재즈 한 곡을 감상하며 읽으면 너무 좋을 거 같아요~
인트로에서 들었던 OST의 제목은 ‘Down in New Orleans’로, 가사를 들여다보면 뉴올리언스가 음악으로 가득한 낭만적인 도시라는 걸 알 수 있어요. 여기서 뉴올리언스는 실제로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한 도시로, 디즈니 영화 <공주와 개구리> 속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죠. 이렇게 영화의 배경과 OST 제목에 도시 이름이 직접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었는데요, 바로 뉴올리언스가 재즈가 탄생한 근원지였거든요.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하던 17세기, 뉴올리언스는 사실 스페인에 의해 처음 발견돼 식민지가 된 이름 모를 땅이었어요. 그러다 시간이 지난 1718년, 이 지역의 소유권이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고, 이때 프랑스는 파리 남쪽 도시인 오를레앙에서 이름을 따 ‘New Orleans(새로운 오를레앙)’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죠. 이후에도 오랜 시간 동안 프랑스령 식민지로 남았던 뉴올리언스는 자연스럽게 프랑스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데요, 여기서 프랑스는 여타 강대국들과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흑인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치며 그들의 인권을 존중해 주는 행보를 보여요. 이는 18세기 프랑스는 시민 혁명*의 성공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만민평등사상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뉴올리언스에서는 인종에 상관없이 유럽계 백인들과 아프리카•아메리카 토착민들이 결혼하는 경우가 존재했고, 그들 사이에서 많은 혼혈 자녀들이 태어나게 돼요. 그리고 여기서 혼혈 자녀들을 지칭하는 용어, ‘크레올(Creole)’이 등장하죠.
*프랑스 시민 혁명 :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일어난 프랑스 혁명
그러던 와중, 미국이 뉴올리언스가 속한 루이지애나 주 전체를 프랑스로부터 사들이게 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평등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인들은 흑인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몇 가지 조항을 덧붙이죠.
☑️ 첫 번째, 흑인들 중 아버지가 프랑스인인 사람들은 백인과 같은 신분을 보장하는 것
☑️ 두 번째, 프랑스인 주인이 죽었을 경우 그 흑인 부인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
위 조항을 통해 프랑스인 남자와 결혼한 노예 신분의 흑인 여성들과 그들의 자녀 크레올들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났어요. 덕분에 백인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된 크레올들은 유럽인으로서의 권리를 누리며 신학문, 음악, 미술 등을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죠. 이렇게 정식 교육을 받은 크레올과, 크레올이 아니었던 토착민들이 뉴올리언스라는 하나의 땅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교류하며 만들어진 음악이 바로 재즈! 즉, 재즈는 흑인 민속 음악과 유럽 음악이 결합해 탄생하게 된 음악 장르였던 것이죠. 그리고 이전까지 들어왔던 클래식 음악과 확연히 다른, 자유분방한 매력을 지녔던 재즈는 뉴올리언스의 시민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큰 사랑을 받기 시작해요. 이런 인기에 힘입어 수백 개의 재즈 클럽과 공연장이 만들어지고 뮤지션들이 생겨나며 뉴올리언스가 곧 재즈, 재즈가 곧 뉴올리언스를 상징하게 된 거라고!
뉴올리언스에 이런 역사가 숨어있는지 몰랐어요! 그럼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도 뉴올리언스에서 자란 뮤지션이었던 건가요?
맞아요. 20세기 재즈를 이끈 루이 암스트롱도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나고 자랐어요. 루이는 1901년 가난한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요, 뉴올리언스의 경제 상황이 좋지 못했고 집안이 가난했던 탓에 어렸을 적부터 생계유지를 위해 힘써야만 했죠. 하지만 뼛속부터 음악인의 피가 흘렀기 때문일까요? 석탄 배달, 폐품 처리 등 고된 일을 이어나가던 와중에도 루이는 조금씩 음악과 친해지기 시작해요. 이웃의 유대인 가족으로부터 코넷*(Cornet)을 악기를 선물 받아 연주법을 독학하고, 더 나아가 길거리에서 버스킹 음악 그룹 ‘Singing Fools’를 만들기도 한다고.
*코넷(Cornet) : 프랑스에서 발명된 금관악기
그러던 1913년, 12살이 된 루이 암스트롱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사건을 겪게 되는데요, 그 시작은 뜻밖에도 소년원에서부터 였어요. 루이는 새해 송년회에서 공중에 공포탄을 쐈다가 주민들의 신고로 유색인 소년원에 송치되어 18개월의 수감생활을 하게 되거든요. 하지만 불행과 고립을 상징하는 감옥은 오히려 그에게 전화위복의 장소였죠. 바로 그곳에서 루이의 인생을 바꾼 음악 교사 피터 데이비스를 만나는 행운을 얻게 됐거든요! 소년원에 들어온 루이가 코넷을 연주하는 모습을 본 피터는, 단번에 루이의 음악적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를 가르쳐보기로 마음먹죠. 그렇게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한 루이는 제대로 된 코넷 연주법을 배워 소년원 내 밴드에서 리더를 맡고, 특별 공연 연주에도 참여하기까지 해요. 시간이 지나 소년원에서 석방된 후 루이는 뉴올리언스를 대표하는 코넷 연주자, 조 올리버를 찾아가 전문적인 음악 수업을 받으며 본격적인 뮤지션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고.
하지만 루이가 성인이 되었을 시기, 뉴올리언스의 불황이 더욱 심해지면서 뉴올리언스 재즈 음악의 근거지였던 스토리빌(Storyville)*이 폐쇄되는 지경에 이르러요. 이에 뉴올리언스의 많은 재즈 음악가들이 대도시로 떠나기 시작하고, 루이도 조와 함께 시카고로 이동하죠. 그곳에서 루이는 조가 이끄는 크레올 재즈 밴드(Creole Jazz Band)의 코넷 연주자로 일하며 재즈 뮤지션으로 성장해요. 그렇게 루이는 음악적 스승인 조의 밑에서 밴드 생활을 이어가다, 본인의 재능에 은근한 질투심을 보이던 조와는 결국 결별하게 돼요. 이를 기점으로 자신의 음악 인생에 변화를 만들어보고자 1924년 뉴욕으로 떠났고, 이전까지 주로 코넷을 연주했던 것과는 달리, 주 종목 악기를 지금의 루이를 떠올리게 하는 트럼펫으로 바꾸게 된다고!
뉴욕으로 이동한 루이는 1925년, ‘핫 파이브즈’라는 독립된 자신의 밴드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스타덤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이해요. 동시에 영화나 라디오쇼에 출연해 익살스러운 입담을 뽐내고, 재즈 뮤지션 중 최초로 타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하며 단순 음악인에서 더 나아가 미국 문화의 상징으로 발돋움하는 데 성공하죠. 그런가 하면 그의 노년기 음악 인생에는 비틀즈 가 등장하기도 하는데요, 추구하는 음악의 색깔이 전혀 다른 두 전설적인 음악인들이 만나 한 때 서로 경쟁했거든요. 재즈의 인기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던 1960년대 미국 음악시장에는 비틀즈 라는 혜성이 등장해 브릿팝(Brit pop)* 열풍을 일으키고 있었어요. 비틀즈의 독주를 막을 자는 없어 보였지만, 루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죠. 루이는 1963년 환갑도 지난 나이에 ‘Hello, Dolly’ 를 발매해 비틀즈를 꺾고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며 그 저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고!
*스토리빌 : 뉴올리언스의 홍등가로, 스토리빌의 많은 클럽을 중심으로 재즈가 탄생함
*브릿팝(Brit pop) : 1990년대 초반 영국에서 생겨난 록의 한 장르
뉴올리언스가 배출한 당대 최고의 재즈 뮤지션이었네요! 그런데 루이 암스트롱이 재즈의 기념비적인 인물이 된 결정적인 업적은 무엇이었나요?
루이 암스트롱이 재즈의 거장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재즈의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는 즉흥 연주를 창안했기 때문이에요. 즉흥 연주는 재즈 음악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이자, 클래식 음악과 구분되는 재즈만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죠! 이런 재즈만의 독자적인 특성에 맞게, 같은 제목의 곡이라도 연주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완전히 색다른 곡으로 변하는 재즈만의 매력, 놀랍지 않은가요? 심지어 같은 연주자라 해도 한 곡에 대한 연주가 매번 달라지기도 하죠. 이렇듯 재즈는 자유분방한 연주가 가능하기에 수백, 수천 가지의 버전이 존재하게 된다고.
루이는 이런 재즈의 즉흥적인 매력을 한층 더 발전시킨 장본인이었는데요, 기존에 주로 여러 사람이 모여 연주하던 재즈를 솔로 연주 스타일에 적합한 방향으로 변화시켰거든요. 그중에서도 특히 대표적인 즉흥 연주 기법인 스캣* 을 고안해 널리 보급하며 20세기 재즈 문화를 선두하는 인물이 되었다고! 뿐만 아니라, 그는 악기 연주자를 뛰어넘어 탁월한 재즈 보컬리스트로도 유명했어요. 비록 그의 목소리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특유의 걸걸한 허스키 톤을 트럼펫 연주와 결합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그만의 재즈 스타일로 만들어냈죠.
*스캣 : 기존의 가사 대신, 의미가 없는 음절 혹은 의성어를 가지고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재즈 창법.
재즈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네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루이 암스트롱은 승승장구한 뮤지션인 것 같은데, 그의 음악사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물론 있었죠. 루이도 인종 문제를 피해 갈 순 없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루이는 흑인으로서 대성한 음악가였음에도 흑인들로부터 종종 미움의 눈초리를 받았죠. 미국 문화 시장의 명사가 된 그는 흑인 출입이 금지된 호텔이나 일류 레스토랑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등 백인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유일무이한 흑인으로 통했거든요. 크레올로서 표면적으로만 백인들과 동등했던 신분을 누렸던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도 백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반적인 흑인들은 누릴 수 없는 것들까지 누리게 된 것! 하지만 당시로서는 너무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루이는 오히려 흑인 사회로부터 백인의 비위나 맞추는 인물이라는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비난과는 달리, 루이 암스트롱은 자신의 위상에 취해 흑인 인권을 외면하는 인물은 아니었어요. 때는 1957년, 미국 남부의 아칸소 주지사가 흑인 학생 9명의 등교를 저지하는 일이 일어나요. 이로 인해 흑인들의 큰 반발이 일었지만,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이와 같은 흑인의 인권 문제에 강력한 대응을 하지 않았죠. 이에 루이는 미 국무부가 주최한 구소련 공연을 취소하고 "미국 정부는 지옥에나 가라" 고 외쳤어요. 이 일로 인해 루이는 FBI의 감시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지만, 결국 그의 말 덕에 아이젠하워가 흑인 학생들이 안전하게 등교할 수 있도록 연방군을 보내면서 무사히 사건이 마무리되었다고.
루이 암스트롱은 본인의 영향력을 올바르게 사용할 줄 아는 뮤지션이었네요. 나은 세상을 위할 줄 아는 뮤지션이라니, 지금 당장 암스트롱의 노래를 들으러 가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