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 히스토리
지난 2021년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는 무엇이었을까요? 신차 등록대수 기준 1위는 1톤 트럭인 현대 포터, 2위는 준대형 세단인 현대 그랜저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바로 미니밴인 기아 카니발이 차지했습니다. SUV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와중에도 카니발은 지난해 7만 3,503대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전체 판매량 3위에 올랐습니다.
미니밴은 '아빠들의 현실 드림카'라 불릴 정도로, 가족을 위한 가장 편리하고 실용적인 차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타기에 부담이 없고, 캠핑이나 레저 활동에도 적합합니다. 최신 미니밴들은 승용차 못지않은 편의사양과 쾌적한 주행 감각까지 더해 평소에는 승용차로, 주말에는 패밀리 카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니밴은 자동차의 여러 장르 중에서는 비교적 역사가 짧은 편입니다. 현대적인 형태의 미니밴은 1980년대에야 등장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전부터 많은 사람을 태우거나 소화물을 실을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많았습니다. 패밀리 카의 끝판왕, 미니밴의 탄생과 발전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 사람을 위한 자동차의 탄생
오늘날 자동차의 장르는 수십 가지에 달하지만,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운전자들이 고를 수 있는 차종은 한정적이었습니다. 승용차는 기껏해야 세단, 쿠페, 왜건 정도에 그쳤고, 특별한 용도의 오프로더 정도가 전부였죠. 지금처럼 흔한 물건도 아니었거니와, 자동차 문화나 교통 환경이 지금처럼 다채로운 모델들을 수용할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당시 승용차는 보통 3인승 벤치 시트를 1~2열에 배치해 6명 정도가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엔진을 얹는 탓에 실내 공간은 생각보다 비좁았는데요. 그래서 여러 사람이 보다 쾌적하게 탈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들이 이뤄졌습니다.
세계 최초의 미니밴형 자동차는 1936년 만들어졌습니다. 미국의 항공 엔지니어 윌리엄 스타우트(William B. Stout)가 만든 스캐럽(Scarab)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더 넓고 쾌적한 실내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미래형 자동차의 스터디 모델로 스캐럽을 개발했습니다.
스캐럽은 차체 뒷편에 V6 엔진을 얹고 매우 긴 휠베이스를 적용했습니다. 앞뒤 차축 사이를 오롯이 캐빈 룸으로 활용해 넓고 아늑한 공간을 확보했는데요. 일반 승용차처럼 6명이 탈 수 있었지만, 1열에 2개의 독립 시트, 2열에 회전할 수 있는 1개의 시트, 3열에 소파처럼 아늑한 3인승 시트를 적용했습니다. 심지어 2열과 3열 사이에 테이블까지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죠.
스캐럽은 비슷한 길이의 일반 승용차보다 훨씬 넓고 실용적이었지만, 당시로선 지나치게 진보적인 스타일과 낯선 설계 탓에 프로젝트를 후원하던 포드 자동차가 양산을 보류하며 극소량의 프로토타입이 생산되는 데 그쳤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자동차가 폭증하면서, 자연스럽게 소형 밴의 수요도 탄생했습니다. 경제를 재건하면서 승용차와 같거나 조금 더 많은, 그리고 버스보다는 적은 인원을 수송할 수 있고, 용도에 따라 소형 상용차처럼 짐을 실을 수 있는 차를 찾기 시작한 것이죠. 특히 좁고 오래된 구도심의 골목길을 다닐 일이 많은 유럽에서 이런 차들이 만들어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1949년 출시된 DKW(데카베) 슈넬라스터(Schnellaster), 폭스바겐 타입 2 '마이크로버스', 피아트 600 물티플라(Multipla) 등입니다. 이런 차들은 승용차의 구동계를 바탕으로 1-박스 형태의 차체를 얹어 공간 활용도를 극대화했습니다. 이런 차들은 승용과 상용 목적으로 골고루 사용됐기 때문에 다목적 차량(Multi Purpose Vehicle, MPV)이라 불렸고, 이 전통이 이어져 오늘날에도 유럽에서는 미니밴을 MPV로 분류합니다.
세계 각지에서 탄생한 미니밴
미국 땅에서 '승용차보다 크고 버스보다 작은', 그러니까 승합차의 역할을 맡은 건 1-박스 내지 1.5-박스 형태의 밴(van)이었습니다. 이런 밴들은 승합차와 상용차의 중간 어디쯤이다보니, 이를 자가용으로 사용하기는 부담스러웠죠. 어지간한 저택이 아니고서야 차고에 들어가지도 않았고요. 1960년대에 보다 작고 편리한 밴들이 출시되긴 했지만, 이들 역시 승용차보다는 경상용차에 가까웠습니다.
1970년대 들어 온가족이 타고 레저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실용적이면서, 승용차처럼 운전하기 편하고 컴팩트한 밴을 찾는 수요가 생겨납니다. 레저 활동의 수요가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더 작고 실용적인 차에 여러 명이 탈 수 있어야 했던 까닭도 있었습니다.
이런 소형 밴 수요를 가장 먼저 포착한 건 크라이슬러였습니다. 당시 크라이슬러는 경영난으로 존폐 위기에 처했었는데요. 전설적인 리더,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는 1984년 스테이션 왜건과 승합차의 장점을 합친 미니밴을 탄생시킵니다. 바로 세계 최초의 현대적 미니밴인 닷지 캐러밴(Caravan)과 플리머스 보이저(Voyager)였습니다.
미니밴은 기존의 1-박스·1.5-박스 밴과는 구조가 상이했습니다. 전륜구동 방식에 승용차처럼 낮은 지상고로 어린이나 여성도 타고 내리기 편했고, 6~7명의 승객을 태우면서 짐도 넉넉히 실을 수 있었습니다. 긴 보닛의 2-박스 구조를 채택해 운전하기 쉬운 데다 충돌 안전성도 훌륭했습니다. 그럼에도 차 크기는 승용차와 비슷해 가정용 차고에 주차할 수 있었죠.
캐러밴과 보이저는 미국 자동차 시장을 뒤흔들 정도로 대히트를 쳤고, 쉐보레 아스트로, GMC 사파리, 포드 에어로스타 등이 잇따라 출시되며 미니밴이 새로운 장르로 부상합니다. 이후 미니밴은 스테이션 왜건을 대체하며 미국 중산층 가정의 대표적인 패밀리 카로 자리 잡게 됩니다.
한편, 유럽에서도 비슷한 시기 미니밴형 MPV가 탄생했는데요. 그 계기는 조금 달랐습니다. 유럽에서는 소형차를 바탕으로 차체 뒷편을 늘려 다인승 차량으로 개조한 소형 액티비티 차량(Light Activity Vehicle, LAV)이 먼저 등장했는데요. 이런 LAV에서 보다 쾌적한 실내공간을 확보하고 승용차와 비슷한 주행감각을 갖도록 진화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유럽에서 처음으로 '미니밴'이라 할 만한 차도 미국과 같은 1984년 등장했습니다. 바로 르노 에스파스(Espace)입니다. 에스파스는 진보적인 설계로 준중형차 크기에도 넉넉한 실내 공간을 갖췄고, 시트 배치를 바꿔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 덕분에 자가용은 물론 업무용 차량으로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에스파스가 성공하면서 몇몇 미국산 미니밴이 유럽 시장에도 출시됐고, 유럽 브랜드들도 합작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미니밴을 내놓습니다. 푸조·시트로엥·피아트·란치아가 합작한 '유로밴' 시리즈, 유럽 포드·세아트·폭스바겐의 협업으로 출시된 포드 갤럭시, 세아트 알함브라, 폭스바겐 샤란 등이 유럽형 미니밴에 속합니다.
이 시기 두 대륙의 미니밴은 대동소이했지만, 1990년대 들어서는 차이가 뚜렷해지기 시작합니다. 미국산 미니밴들은 '대륙의 기상'을 담아 몸집을 점차 키우고, 큰 차체에 적합한 2열 슬라이딩 도어를 채택합니다. 반면 유럽산 미니밴들은 도로 사정에 맞춰 몸집을 키우지 않고 일반적인 도어를 다는 형태로 발전합니다. 비슷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각자의 소비자 취향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진화한 것이죠.
한편,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낸 일본 브랜드들 역시 미니밴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기존에도 승합차 용도의 토요타 하이에이스, 닛산 바네트, 미쓰비시 델리카 같은 모델들이 있었지만, 미국이나 유럽과 마찬가지로 보다 승용차 같은 주행 감각에 실용성을 더한 컴팩트 미니밴이 1980년대 들어 등장합니다.
일본 미니밴의 시초로 여겨지는 차는 닛산 프레리입니다. 컴팩트 세단인 닛산 써니를 바탕으로 만든 프레리는 전고가 높은 왜건형 바디에 슬라이딩 도어를 채택했습니다. 완전한 미니밴이라고 하긴 애매했지만, 승용차와 승합차의 장점을 합친 미니밴의 개념에 가까웠죠.
뒤이어 출시된 미쓰비시 샤리오는 프레리와 마찬가지로 왜건형 미니밴이었지만, 1990년 출시된 토요타 에스티마와 닛산 세레나, 1995년 출시된 혼다 오딧세이 같은 모델들은 정통 미니밴 스타일을 채택합니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북미 시장 진출을 노렸을 뿐 아니라, 일본 내수 시장에서도 미니밴 붐을 불러오며 성공하게 됩니다.
오늘날 일본 브랜드들은 북미 스타일의 풀사이즈 미니밴과 유럽 스타일의 컴팩트 미니밴, 일본 내수 전용의 고급 미니밴 등 다양한 미니밴을 생산 중입니다. 일본 내수 시장에서 미니밴은 실용적인 차이자 동시에 고급 의전용 차량으로도 애용되며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나라에서 미니밴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수출 시장 공략을 위해 오랫동안 꾸준히 미니밴을 개발, 생산해 왔으며, 최근에는 레저 인구 증가로 내수 시장에서도 미니밴이 판매량 상위권에 꾸준히 들 정도로 높은 인기를 구가합니다.
중국이나 인도 시장에서는 넓은 공간의 장점을 살려 고급 의전용 미니밴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실용적인 다목적 차량을 선호하는 동남아 국가에서는 SUV와 미니밴의 장점을 합쳐 지상고가 높고 7명이 탈 수 있는 왜건형 미니밴(아시안 유틸리티 차량, AUV라고도 부릅니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저물어 가던 미니밴이 다시 주목 받는 이유
세계 각지에서 온 가족의 차로 사랑 받아 온 미니밴이지만, 오늘날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핵가족화와 1인가구 증가로 다인승 MPV의 수요가 줄어든 데다, 그나마 남아 있던 수요는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SUV로 대체되면서 미니밴을 찾는 이가 점점 줄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대 미니밴 시장인 미국만 하더라도 2014년 55만 6,000여 대에 달했던 미니밴 판매량은 2021년 31만 대 수준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시판 중인 미니밴의 종류도 8종에서 4종으로 줄어들었죠. 기존의 패밀리 카 수요는 3열 시트를 갖춘 7~8인승 대형 SUV로 대체됐습니다. 유럽 시장도 상황은 비슷해서 7인승 MPV는 점차 단종되고 SUV가 그 자리를 채우는 추세입니다.
미니밴들도 트렌드에 맞춰 외모를 바꾸고 있기는 합니다. 당장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아 카니발이나 유럽 미니밴의 원조인 르노 에스파스의 최신 모델들만 보더라도, 차체 하부에 SUV를 닮은 몰딩을 더하는 등 디자인적 측면에서 SUV의 색채를 강조하고 있죠.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세그먼트를 집어삼키는 SUV의 인기에, 우리나라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전통적 미니밴 시장은 사그라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래차 업계에서는 다시 미니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퇴장을 준비하고 있던 미니밴이 미래의 자동차로 기대감을 모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전기차의 경우 엔진을 차체 앞쪽에 배치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거주성을 극대화한 미니밴형 차체를 적용하기가 수월합니다. 전용 플랫폼을 사용하는 전기차는 구동축에 모터를 달기만 하면 되므로 A-필러를 전진시켜 실내 공간을 늘리기 쉽습니다. 또 차체 하부에 배터리를 스케이트보드 형태로 배치해 평탄한 플로어를 만들기도 쉽죠.
게다가 다가오는 자율주행차 시대에는 자동차의 거주성이 중요해지는데요. 지금까지의 자동차 내부가 이동이라는 행위를 수행하는 공간이었다면, 자율주행차에서는 인공지능이 자동차를 알아서 운전하고, 탑승객들은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미니밴형 차체 내부에 거실 같은 공간을 배치한 최신 콘셉트카에서 그러한 발전 방향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용도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맡게 될 목적 기반 차량(Purpose Built Vehicle, PBV)은 자가용보다 넉넉한 인원과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어야 하는 만큼, 미니밴의 형태에 수렴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PBV는 택시보다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있고, 버스보다는 개인화된 차량으로서 전동화 파워트레인과 자율주행 시스템에 의해 운행되는 미래 모빌리티 중 하나입니다. 이런 역할을 위해서는 인원과 물자 수송이 모두 가능한 미니밴 형태가 가장 적합합니다.
처음 탄생한 미니밴은 대가족이 여행을 떠나기 위한 자동차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면서 미니밴은 최신 미래차 기술을 담은, 달리는 응접실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처음과는 역할이 조금 달라졌지만, 여전히 쾌적한 여정을 위한 차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온 가족의 즐거운 여행을 책임질 미니밴의 변신을 기대해 봅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