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렌드
르망 24시 내구레이스는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모터스포츠 대회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올해로 9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르망 24시는 말 그대로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 만큼 차량의 퍼포먼스는 물론 내구성과 드라이버의 정신력, 팀워크까지 요구되는 극한의 레이스입니다. 1년에 단 한 번 열리는 대회가 1년 내내 시즌이 치러지는 포뮬러원(F1)이나 월드랠리챔피언십(WRC)에 맞먹는 인지도를 지닌 것도 그 때문이죠.
그런 르망 24시의 인기가 요 몇 년 새에는 시들했습니다. 르망을 주름잡던 폭스바겐 그룹 산하의 아우디와 포르쉐가 2015년 디젤게이트 이후 잇달아 철수했고, 레이스카 개발에 드는 천문학적인 비용 탓에 새로운 팀들은 출전을 주저했습니다. 그래서 2018년 이후로는 종합 1위 토요타가 사실 상 홀로 빈집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르망 24시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2021년부터 새로 도입된 하이퍼카 클래스 덕분입니다. 르망 하이퍼카(Le Mans Hypercar, LMH)와 르망 데이토나 h(Le Mans Daytona hybrid, LMDh) 등 두 가지 규정의 레이스카가 출전하는 하이퍼카 클래스에 내로라 하는 자동차 회사들이 출전을 예고하면서, 사르트 서킷에서 벌어질 "별들의 전쟁"이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하이퍼카 클래스는 기존 르망 프로토타입 1(Le Mans Prototype 1, LMP1)을 대체하는 르망 24시의 최상위 클래스입니다. 르망의 간판 격인 프로토타입 레이스를 계승하되, 그간 지적돼 온 비용 부담을 줄이고 다양한 팀들이 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먼저 마련된 건 LMH 규정입니다. LMH 레이스카는 하이퍼카 클래스에서도 비교적 자유도가 높은 편인데요. 순수 레이스용 프로토타입 또는 로드카 기반의 레이스카로 출전할 수 있습니다. 파워트레인은 순수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 중 선택할 수 있고, 엔진 또한 레이스 전용 엔진과 기존 시판된 엔진 중 선택할 수 있는 등 다양한 조합이 가능합니다.
당초 LMH 규정이 발표될 당시에는 일반도로용 스포츠카 기반의 레이스카가 출전해 옛 GT1 클래스의 영광이 재현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출전 팀이 프로토타입 레이스카를 개발하는 실정입니다. LMH 프로토타입은 하이퍼카 클래스 참가 규정 중 가장 설계 자유도가 높다는 장점 덕에 유럽의 레이싱 팀과 제조사들의 출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LMDh 규정은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한 레이스에 출전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입니다. 차세대 LMP2 섀시를 공급 받아 제작하는 프로토타입으로, 차체 하부 설계를 제외하고 외관을 자유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개발 비용이 많이 드는 하이브리드 시스템 또한 기성품을 공급 받기 때문에 레이스카 개발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습니다.
LMDh의 가장 큰 특징은 르망 24시가 포함된 FIA 세계내구레이스챔피언십(WEC)과 미국의 IMSA가 주관하는 스포츠카 챔피언십에 한 대의 차량으로 모두 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LMDh 자체가 FIA와 IMSA, ACO(르망 24시를 주최하는 협회)가 모여 제정한 통합 규정이기 때문인데요. 흔히 내구레이스의 '트리플 크라운'이라 불리는 르망 24시, 데이토나 24시, 세브링 12시 등 세 경기 모두 출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 내구레이스의 정상을 동시에 노리는 팀에게는 솔깃한 제안입니다.
팬들에게도 LMDh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LMDh 규정 중 "제조사에서 만드는 자동차의 디자인 특징을 반영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기 때문인데요. 보통 프로토타입 레이스카의 외형은 양산차 디자인과 거리가 멀기 마련인데, LMDh 레이스카는 양산차의 특징을 곳곳에서 볼 수 있으니 흥미를 돋웁니다. 또 차체와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공용화하는 대신 엔진 설계의 자유도는 높여 제조사마다 특색 있는 엔진을 투입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 종류의 레이스카 규정이 마련됐지만, LMH와 LMDh 모두 성능은 대동소이합니다. 차체 중량은 1,030kg 이상, 구동계의 최고출력은 680마력으로 제한돼 있으며, 타이어도 미쉐린이 독점 공급합니다. 여기에 BoP(Balance of Performance)를 통해 성능 조율까지 더해져 상당히 치열한 경합이 벌어질 전망입니다.
계속 강조한 것처럼, 하이퍼카 클래스의 핵심은 비용 절감입니다. 기존 LMP1 클래스에 투입되는 프로토타입 레이스카의 제작 비용은 대당 1,500만 달러(한화 약 188억 원)에 달했습니다. 차량 개발 비용, 팀 운영 비용 등을 합치면 연간 수백억 원이 넘는 비용이 투입되니 어지간한 글로벌 기업이 아니면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반면 많은 부품을 공용화한 LMDh 레이스카의 제작 비용은 대당 100만~150만 달러(한화 약 12억~18억 8,000만 원) 수준으로, LMP1 대비 1/10에 그칩니다. 비교적 많은 비용이 투입되는 LMH 프로토타입의 경우도 LMP1 대비 80% 가량 저렴한 비용으로 레이스카 제작이 가능합니다. 이에 따라 레이싱 프로그램의 연간 운영 비용도 획기적으로 줄어 레이스카 1대로 한 시즌의 대회를 치르는 비용 역시 100억 원 미만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제는 완성차 업체가 아닌 레이싱 팀들도 부담 없이 출전을 고려할 수 있는 수준이죠.
이처럼 저렴한(?) 비용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내구레이스에 출전할 수 있다는 이점 덕에 여러 팀들이 하이퍼카 클래스에 출사표를 던지고 있습니다. 르망 24시에 출전을 확정 지은 팀만 이미 10개에 달하고, LMDh 레이스카를 개발해 IMSA 스포츠카 챔피언십에 나가는 팀까지 합치면 12개나 됩니다.
당장 이번 주말로 예정된 2022년 르망 24시에 토요타, 글리켄하우스, 알핀 등 3개 팀이 LMH 프로토타입을 출전시킵니다. 내년에는 LMH 규정의 페라리와 푸조, 반월(Vanwall)이 합류하고, LMDh 규정의 아우디, 포르쉐, BMW도 르망에 복귀합니다. 르망 우승 전적이 있는 쟁쟁한 팀들인 만큼 치열한 경쟁이 예상됩니다.
IMSA 스포츠카 챔피언십에는 어큐라와 캐딜락의 LMDh 레이스카가 2023년부터 출전하며, 람보르기니도 사상 처음으로 LMDh 레이스카를 통해 하이퍼카 클래스에 출사표를 던집니다. 이 밖에도 부가티, 맥라렌, 포드 등의 참전 루머가 돌고 있습니다. 다가올 미래의 르망 24시가 "별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르망 24시의 재흥을 이끌고 있는 하이퍼카 클래스는 르망을 넘어 모터스포츠 업계 전체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갈수록 규정이 고도화되면서 모터스포츠의 출전 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고, 이로 인해 출전 팀이 줄어드는 건 비단 르망 24시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뜩이나 전기차로의 패러다임 대전환, 코로나19 팬데믹과 글로벌 물류 대란 여파 수습에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붓고 있는 제조사들은 돈도 많이 들고 마케팅 효과도 예전같지 않은 모터스포츠에서 발을 빼는 추세입니다. 경쟁이 줄면 인기도 줄고, 이로 인해 더 많은 팀들이 떠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죠.
그런 와중에 하이퍼카 클래스의 등장과 대흥행은 향후 모터스포츠 업계가 보다 적극적인 비용 절감을 통해 출전 팀을 늘리고 경쟁을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부담 없는 비용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다면 전통의 강호들과 떠오르는 신예들이 더 많은 대회에서 경쟁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선은 르망의 '실험'이 성공하고 하이퍼카 클래스가 안착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 볼 일입니다.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더욱 빛날 르망 24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건 과연 어떤 팀이 될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