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렌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낯선 신문물 같았던 전기차가 어느새 우리의 일상으로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이미 국내에서 구매할 수 있는 전기차의 종류는 두 자릿수로 늘었고, 시장점유율은 빠르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2022년 상반기 국내 시장에 판매된 순수전기차는 6만 8,850대로, 전체 신차 판매 중 8.4%를 차지했습니다.
다양한 브랜드와 세그먼트의 전기차가 시판되면서 전기차를 고르는 선택 기준도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전기차를 평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1회 충전 시 주행 가능 거리(이하 주행 거리)입니다. 실제로 배터리를 모두 쓸 만큼 장거리 운행을 하는 것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충전이 오래 걸리는 전기차의 특성 상 대다수 운전자들은 주행 거리가 긴 전기차를 선호합니다. 주행 거리가 긴 전기차일 수록 보조금 수령이 유리하다는 이유도 무시할 수 없고요.
그런데 전기차의 주행 거리에 대한 정보를 찾다 보면 헷갈리는 점이 있습니다. 주행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이 다양하다 보니 같은 차종도 나라마다 주행 거리 제원이 다른 것입니다. 때문에 수입 전기차의 경우 국내 인증 전까지 "유럽(또는 미국) 기준 OOOkm"이라고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기차의 성능이 나라마다 다른 것도 아닌데, 왜 주행 거리는 나라마다 바뀌는 걸까요?
현재 각종 매체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전기차의 주행 거리 측정 기준은 유럽 WLTP, 미국 EPA, 한국 환경부 인증 기준 등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측정 방식 차이가 결국 제원 상 주행 거리에 영향을 미치는 셈인데요.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유럽 WLTP 기준
우선 유럽 브랜드 전기차에서 많이 볼 수 있는 WLTP 기준입니다. 사실 전기차 외에 디젤차 배출가스 논란이 불거졌을 때 종종 들을 수 있었던 이름인데요. WLTP는 'Worldwide harmonized Light vehicles Test Procedure'의 약자로, UN 유럽경제위원회에서 제안한 승용차 및 경상용차용 연비 측정 기준입니다. 2017년 유럽연합을 시작으로 세계 30개 넘는 국가가 WLTP 측정 방식을 도입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연비 기준입니다.
과거 유럽의 연비 측정 기준으로는 NEDC(New European Driving Cycle) 기준이 많이 사용됐는데, 1970년대에 도입된 기준이다 보니 21세기 교통 환경에는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WLTP는 테스트 시간과 거리를 늘려 보다 다양한 교통 변수를 측정에 반영하고 현실적인 연비와 배출가스량(내연기관차)을 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WLTP 기준은 유럽 교통 환경을 반영해 설정된 도심 및 고속도로 주행 사이클에 따라 다이나모미터(dynamometer, 속칭 '다이노'라고도 불립니다)를 달리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여러 조건에서 주행한 결과에 보정값을 반영해 최종적으로 주행 거리를 산출하는데요. 후술할 두 가지 방식과 달리 별도의 보정계수를 곱하지는 않습니다.
때문에 WLTP 기준은 세 가지 방식 중 가장 전기차 주행 거리가 길게 나옵니다. 유럽에서 300~400km대의 긴 주행 거리 인증을 받은 전기차가 우리나라나 미국에 출시될 때 기대에 못 미치는 주행 거리를 나타내는 이유도 이러한 기준 차이가 큽니다.
미국 EPA 기준
유럽과 달리 미국은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에서 제정한 독자적 테스트 방식을 적용합니다. 유럽과 미국의 교통 환경이 다른 만큼, 내연기관 시대부터 이러한 기준 차이가 존재했는데요. 전기차의 주행 거리 측정에 있어서도 상이한 방식을 적용합니다.
EPA 방식도 WLTP 방식과 마찬가지로 실험실의 다이나모미터를 사용해 진행됩니다. 이 장치에 전기차를 올려두고 도심과 고속도로의 다양한 주행 환경을 고려한 '멀티 사이클 테스트(Multi-Cycle City/Highway Test Procedure)'를 실시합니다.
전기차는 제조사 기준에 따라 완충한 뒤 하룻밤이 지나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다양한 조건에 맞춰 주행하는 테스트는 배터리가 바닥나 차량이 속도를 내지 못할 때까지 이뤄집니다. 이후 총 주행 거리와 배터리 재충전량을 비교해 전비를 산출하고, 도심 55%·고속 45%의 가중치를 반영한 뒤, 보정계수 0.7 또는 5-cycle(도심, 고속도로, 고속 및 급가속, 에어컨 가동, 저온) 보정식을 곱합니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EPA 기준의 주행 거리가 산출됩니다.
여기서 보정계수·보정식은 기온에 따른 배터리 성능의 편차, 실제 주행 중 발생하는 다양한 변수를 고려한 것인데요. 때문에 WLTP 기준에 비하면 EPA 기준의 주행 거리가 훨씬 짧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EPA 기준보다 더 가혹한 결과가 있으니, 바로 한국 환경부 기준입니다.
한국 환경부 기준
한국의 환경부 주행 거리 인증 기준은 앞서 소개한 미국 EPA 기준을 바탕으로 합니다. 환경부가 직접 측정하는 것이 아닌 공인 기관의 성적서를 제출하면 환경부가 검토 후 인증하는 방식이기는 하나, 공인 기관 또한 EPA의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공신력을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환경부의 측정 방식은 기본적으로 미국 EPA와 동일합니다. 미국 FTP-75 프로토콜에 따른 멀티 사이클 테스트가 진행되며(단, 저속전기차는 도심 주행만 측정), 최종 측정 거리에 0.7의 보정계수나 5-cycle 보정식을 대입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PA보다 우리나라 환경부의 인증 주행 거리가 더 짧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데요. 저온 주행 시험에서 미국은 성에 제거 기능만 작동하지만 우리나라는 성에 제거 기능을 켜고 히터를 최대로 작동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름과 겨울 기온 차이가 커 히터 사용 빈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환경을 반영하고 상온 및 저온 주행 거리 차이를 보정하기 위함인데요. 이 때문에 한국 환경부 기준은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전기차 주행 거리 측정 방식으로 꼽힙니다.
어떤 주행 거리를 믿어야 할까?
일반적으로 전기차 인증 주행 거리는 'WLTP > EPA > 환경부' 순으로 길게 나옵니다. 각각의 기준 모두 체계적인 시험을 통해 산출된 만큼 신뢰할 만한 값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실주행 거리와 인증 주행 거리 간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국내외 많은 전기차 리뷰를 살펴보면 각국의 인증 주행 거리보다 많은 거리를 달리거나, 반대로 주행 거리가 인증값에 못 미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 인증 주행 거리와 실주행 거리가 100km 이상 차이 나기도 하는데요. 이 때문에 환경부 기준이 최신 기술을 반영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짧은 주행 거리를 산출한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행 거리는 각 운전자의 주행 패턴이나 운행 환경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내연기관차도 각국 인증 기관이 공인연비를 산출하지만, 개개인에 따라 공인연비보다 좋거나 나쁜 연비를 기록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특히나 전기차는 냉·난방, 회생제동 등 여러 변수가 주행 거리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운전자의 재량에 따라 차이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건, 동일한 기준으로 인증 받은 차량들의 주행 거리는 동일한 테스트를 거쳐 산출된 상대값이라는 점입니다. 적어도 동일한 기준으로 인증 받은 전기차들의 주행 거리 간에는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가령 전기차 A와 B가 WLTP 기준으로는 300km·400km의 주행 거리를 인증 받고 환경부 기준으로는 250km·350km의 주행 거리를 인증 받았다고 해 봅시다. 같은 사람이 같은 주행 패턴으로 두 전기차를 운행한다면 개개인에 따라 실주행 거리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반적으로 B가 A보다 긴 실주행 거리를 기록할 것입니다. 인증 주행 거리는 이러한 '경향성'을 확인하기 위한 레퍼런스인 셈입니다.
아직까지는 충전 시간, 보조금 등 여러 이유로 전기차 주행 거리의 측정 기준이나 편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전기차가 대중화되고 기술의 발전으로 충전의 제약이 사라질수록 주행 거리에 대한 우려 또한 사라질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자신의 주행 패턴과 운행 환경을 고려해 다양한 기준의 전기차 주행 거리를 참고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