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다시 네 삶에 펜을 가져다 대고 풀이를 시작하라
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명확히 내가 바라는 것을 실현할 자유, 내가 해낸 일들이 내가 바라는 일에 쓰일 수 있는 자유, 그것이 세상에 어떤 형태의 족적을 남기는 꿈. 글을 쓰기 시작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나의 자유로운 사고가 세상에 남길 자국 하나를 보려고. 하지만 꿈을 꾸기 전 지금 이 시대, 우리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멸시당하는 순수학문과 잊혀져 가는 인문학, 더는 누구도 봐주지 않는 문학의 틈바구니에서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를 사람으로 본다면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이제는 누구도 봐주지 않는 역사적 유물 하나를 붙잡고 하루종일 깎아내고 복원하는, 혹은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잊지 않고 써내려가는 사람.
성적 지상주의, 결과 지상주의의 사회에 버려진 아이 한지우와 자유를 찾아 탈북한 천재 수학자 리학성의 만남을 보자. 사회의 외곽에 버려진 두 사람이 만나 우정을 쌓는 건 평범한 일이나 그들 사이에는 '수학'이라는 하나의 커넥션이 놓인다. 언뜻 보면 재미 없고 어려워 보이는 이 단어가, 수많은 숫자가 두 사람의 관계를 더 끈끈하게 만든다. 전학 갈 위기에 처한 '사회배려자 전형 합격자' 한지우는 과외와 값비싼 대치동의 학원비를 감내하는 동급생들에 비해 수학 성적이 한참 뒤떨어진다. 가난한 집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자라며 '성공해서 어머니에게 보답하겠다'는, 어찌 보면 재미없고 뻔한 클리셰.
개천에서 용난다는 문장이 무용한 요즘이다. 아무리 공부해도 자본을 등에 업은 아이들에게는 이기지 못하고 특목고며 명문고라 하는 고등학교에서 도망치듯 전학가는 아이들은 현실에도 있다. '사회 배려자'라는 이름으로 뽑아둔 아이들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좌절하고 포기한다. 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배려란 뭘까. 우리는 정말로 자유로운가. 아무리 공부하고 노력해도 이길 수 없는 아이들의 틈에서 그들은 진정 자유로이 공부할 수 있는가.
세상 모든 것은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는 움직임만이 아니라도 사람의 마음을 수학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그토록 순수한 마음을 순수한 탐구로 증명해낼 수만 있다면. 리학성은 순수한 수학을 사랑하는, 말하자면 '수학 오타쿠'이다. 수학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보여주는 그의 대사는 밑도 끝도 없이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중 제일은 수학이 아름답다고 외치는 씬이다. 수학에 학을 떼는 요즘의 사람들이 본다면 정말 기이하게밖에 느껴지지 않는 장면인데, 어쩐지 웃음이 나기도 했다. 무언가를 좋아할 때의 마음이 늘상 그런 모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애정은 애정으로 끝맺지 못한다.
자신의 애정이 군사 무기라는 결과로 도출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리학성은 절망했다. 그래서 학문의 자유를 위해,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여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족적을 남기기 위해 탈북을 감행했다. 하지만 탈북해 온 대한민국에서도 진정한 자유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엎친 데 엎친 격으로 금이야 옥이야 아끼던 아들까지 목숨을 잃자, 그는 절망한다. 이곳은 참 이상한 나라다. 가장 밑바닥에 있으면 밑바닥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사랑하는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자유는 세계 어디에 있을까. 수학으로 무한의 공간을 가늠할 수 있는 천재 수학자는 꼭 이상한 나라에 갇힌 앨리스와 같은 기분이 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뒤로 돌아갈 수는 없는, 불행한 외부자.
수학적 용기란 무엇일까.
작중에서 리학성은 '수학적 용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학적 용기란 단순히 어려운 문제를 풀어내는 게 아니라,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포기하거나 주눅들지 않는 일. 수학으로 세상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다고 한 만큼 수학적 용기는 꼭 우리 삶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있어도 묵묵하고 꿋꿋하게 자신이 풀어야 할 수식의 처음부터 다시 붙잡는 일이다. 단순히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버티라는 메시지다.
세상이 어둡게 흘러가고 자유와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도, 수학은 우리에게 말한다. 어딘가에 답이 있다고. 풀리지 않았던 리만 가설의 난제를 풀어낸 리학성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절망에 삼켜져 잊었다. 어딘가에 답이 있다는 걸 몰랐던 한지우는 리학성을 만나 깨달았다. 단순히 노력하다 보면 모든 게 잘 된다는, 꽉 막힌 삶의 지혜가 아니다. 우리의 삶을 증명해내는 건 우리가 해야 한다는, 그리하여 문제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신을 증명해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다.
세상에 나와 자유로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며 그것이 세상에 긍정적인 족적을 남기기를 바라는 일. 그 발자국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일. 수학적 지혜는 그로부터 온다. 모든 것이 지치고 망가져가는 듯 느껴지는 2022년이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담대히 버티는 법을 배우길 바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수식의 첫 번째 풀이를 위해 펜을 가져다 대는 것뿐. 그럼에도, 언젠가는 당신의 수학적 용기가 무언가를 증명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