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왜 보수적일까? - 무신정권
일본의 정체를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잘라파고스(Jalapagos)'라는 단어이다. 잘라파고스(Jalapagos)라는 단어는 일본(Japan)+갈라파고스(Galapagos)의 합성어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집필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준 바로 그 갈라파고스 제도를 말한다. 다시 말해 잘라파고스라는 단어는 일본이, 마치 갈라파고스 제도처럼 전 세계적 흐름에 뒤쳐져 자신들의 세계에서 갇혀 살고 있다는 뜻의 자조적인 뜻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잘라파고스'라는 단어는 정말 찰떡이라 느낀다. 모든 것들이 한국과 같은 용도의 물건이지만 일본만의 색채가 있고 20년쯤 더 오래된 느낌이면서 깔끔하다. 키오스크의 예를 들면 도쿄 긴자 한가운데의 맥도날드에서는 키오스크가 없으나 지방 소도시의 허름한 라멘집엔 서른 살쯤 먹은 것 같은 식권발매기(자판기와 키오스크 그 사이 어딘가의 느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정말 갈라파고스의 생태처럼 일본만의 독특한 발전상도 흔히 보인다. 목조건물에서 홈스테이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숙소의 화장실이 마치 이동식 컨테이너를 건물 안에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구조였다. 플라스틱 화장실 안에 세면대, 욕조, 변기 등 모든 구조물이 말 그대로 공장에서 함께 '찍혀서 나온'모양새였다. 누수 등의 문제가 덜할 테니 선진적이면서도, 이미 20년 전부터 이런 방식이 보편화된 것처럼 보여 한편으론 낡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조금 부정적인 측면을 들여다보자면, 일본은 특유의 팩스문화와 아날로그문화로 악명이 높다. 코로나 당시 확진자 추이 그래프를 종이로 일일이 이어 붙이던 모습은 당시 꽤나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다.
또한 한 때 서버 해킹문제로 여러 기업들이 고초를 겪은 바가 있는데, 당시의 한 일본 기업은 모든 핵심 자료가 죄다 프린트된 아날로그 자료일 뿐 디지털화되어 있지 않아서 오히려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역시 모든 것엔 명암이 있나 보다.
전 세계에서 손에 꼽는 선진국이면서도 보수적인 나라, 미래적인 과거, 어떠한 분기점에서 다른 세계와 떨어져 나온 세계, 그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겪고 있다. 그 주요한 원인은 현 세계 경제를 이끌고 있는 4차 산업혁명, 그리고 그 기반이 되는 IT산업에서의 추락을 꼽을 수 있다. 플라자 합의로 인한 충격만이 원인인 것은 아니다. 플라자 합의 이전에도 일본 기업들과 일본 전체의 성장률은 급격하게 둔화하고 있었다.
도요타로 대표되는 공정 상의 혁신(과연 지금 테슬라 혁신의 수명은 몇 년일까)은 어느새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일본은 더 이상 혁신적인 국가가 아니게 되었다. 삼성의 급부상은 아마 좋은 예시리라 생각한다. 현재의 한국을 짊어지고 있는 굴지의 반도체 기업들은 9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아주 미미한 기술력만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10년대의 중국처럼 일본반도체 기업들의 기술력을 빼내는 데에 골몰하고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며 이 같은 상황은 역전되었다. 한국 기업들이 DRAM 공정에서 혁신을 거듭하는 동안 일본 기업들은 뒤쳐지며 IT버블 이후 08년 금융위기 사이 10년 간 일본 기업들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이었던 지위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반도체 시장에서의 몰락과 더불어 80년대 후반 당시 전 세계 시총 1~5위를 독차지했던 일본 기업과 일본의 수출경쟁력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일본을 추락하게 만든 잘라파고스 현상의 원인에는 와(和)문화로 대표되는 일본 사회의 보수성과, 특히 채용 관례를 포함한 기업 문화가 빠질 수 없다. 와문화라 함은 자신에게 부여된, 혹은 자신의 가문에 부여된 역할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와문화의 유래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은 헤이안 시대 이후, 그러니까 13세기의 시작부터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줄곧 무신정권이 지배하던 나라였다. 무신정권은 근본적으로 사상적 명분이 부족하다. 무신정권이 필연적으로 사상적 명분을 만들 능력이 안 되어서 명분이 부족하다기 보단, 엄밀히 말하면 사상적 명분을 통한 정권 정당화를 만들어내지 못했기에 무신정권으로 남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그렇기에 일본의 무신정권은 진즉에 권력을 잃고 뒷방 늙은이가 되어버린 천황을 상징으로 두었고, 천황제도가 2700년이라는 기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경우 중국과 육로로 연결되어 있고, 해로 또한 접근성이 나쁘지 않았기에 사상을 수입하는 과정을 통해 정권을 정당화하는 것이 수월했다. 고려가 불교로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조선은 유교로 정권의 정당성을 획득한 것처럼. 반면 일본은 우리가 카미카제(신풍, 神風)로 잘 알고 있는 원나라의 정벌 실패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대외 교류가 결코 호락호락한 지리적 요건이 아니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조선의 통신사들을 극진히 대접한 역사는 이러한 측면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각설하고, 무신들이 최상위 계층인 사회에서는 백성들이 순종적일 수밖에 없다. 권력자들의 말을 거역하면 즉결처분되는 세상에서 순종적이지 않고는 애당초 살아남기조차 불가능하니까.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순종적이고 보수적이며 수동적인,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에 충실한 와문화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일본은 역사적으로 지역 간 거주 이전이 여타 동북아시아 국가에 비해서도 제한되었기에 더더욱 집단 내의 역할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본의 다이묘 제도로 인한 지역 간의 갈등이 큰 데에서 비롯되었다. 일본은 다이묘가 이끄는 각 지역 간의 첨예한 세력 대결이 지속된 역사가 있다. 이는 단지 유명한 전국시대뿐만 아니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열어젖힌 에도막부 시대 이전까지 40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의 이야기다. 심지어 에도막부 시대에 들어서서도 조선같이 지방관을 파견하는 행정관료제가 아니라 다이묘가 각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리고 각 다이묘의 지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 이후부터는 관할 지역이 쌀 몇 만석을 생산하느냐로 표기되었다. 그렇기에 지역의 통치자들은 관할 백성들의 거주이전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행정관료들처럼 단지 자신의 실적의 문제가 아닌, 생명과 권력의 문제였으니까.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