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쪼꼬 Feb 22. 2024

6. 오토바이 말고 아내를 쓰다듬어 주세요.

배달을 마치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 집사람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주차장을 빙빙 돌고 있었겠지. 오토바이와 헬멧 등을 서둘러 정리하고 덮개를 덮었다. 그제야 저 멀리서 집사람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얼굴 표정을 살피니 여전히 구겨진 채로 눈을 흘겨 떠 고운 인상이 성난 고릴라처럼 험악해져 있었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옆으로 가 보조를 맞춰 걸었다. 아내가 무슨 말이든 먼저 해주길 기다리면서.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악플보다 무서운 무플이었다. 집사람은 덮개로 덮인 오토바이를 발견하고는

"이거야?"

하고 물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 여자가  사랑스러운 애마의 방댕이를 발로 쿵 걷어찼다. 세게는 아니었지만 분명 '쿵'하는 소리가 우뢰와 같이 들렸다. 난 마치 내 볼기짝을 걷어 차인 듯 놀랐다. 아니 차라리 내 것을 걷어 차 준 것이었다면 좋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집사람은 그대로 발길을 옮겨 등을 보이며 아파트로 들어갔고 나도 그녀를 따랐다. 조용한 엘리베이터 안에 칠흑과 같은 정적이 흘렀다. 무겁고도 숨 막히는 시간은 억겁에 가까웠다. 하는 수 없이 죄 많은 내가 먼저 말 문을 열었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

응? 무슨 정신이었을까? 왜 이 말이 나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튀어나온 내 당부에 집사람은 눈알만 겨우 돌리며 또다시 나를 째려보았다. 따가운 눈초리가 곁눈으로도 충분히 느껴지는 듯했다. 언젠가 내가 크게 실수했을 때 보았던 그 눈이었다.

"왜? 왜 하지 말라 그래?"

"아니... 엄마 괜히 걱정하시니까."

"왜? 어머님이 망치로 때려 부술까 봐?"

집사람의 말대로였다. 결혼 초 오토바이를 사겠다며 집사람을 설득한 적이 있었다. 오토바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집사람이 나의 화려하고도 진중한 논리적 설득력에 거의 다 넘어온 상황이었다. 신이 나서 어떤 녀석으로 데려올지 검색에 검색을 더하던 그때 엄마가 집에 잠시 다니러 오셨다. 집사람은 지체 없이 엄마에게 오토바이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엄마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셔서는

"사기만 사! 내가 망치로 조각조각 때려 부숴버릴 거야!"

어렸을 때의 엄마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엄마의 한마디에 내 소중한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 후로 집사람까지 덩달아 결사반대를 하게 된 건 덤이었다. 집사람은 우리 엄마를 일종의 지원군으로 여기고 있었을 테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잘못한 건 아나보지?"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집사람은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당당하고 힘차 보이던지 '아... 엄마한테 이르러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넘어야 할 산이 집사람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엄마와 같이 나를 쑤셔댄다면 아마 난 더 이상 견디지 못해 두 손을 들어 항복할지도 모른다. 그리곤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나의 소중한 보물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입양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시는 12월 25일, 가족 나들이날을 이실직고의 날로 스스로 정해두었건만. 집사람을 도와주려던 나의 선하고도 배려심 넘치는 의도가 이런 불상사로 이어지다니. 하늘도 참 무심하시기도 해라. 한 번이라도 내 편 좀 들어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 네 편을 들지 않은 건 너 자신이다, 이 모질아.


시무룩과 태연함 그 언저리의 표정으로 집안에 들어섰다. 그런데 집사람은 엄마에게 인사만 드리곤 더 무어라 말없이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쉬었다가 고자질할 건가? 나도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엄마와 집사람 둘만 따로 남아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고 싶어서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집사람은 말없이 눈에 보이는 집안일을 해댔다. 집사람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나는 괜스레 몸이 뻣뻣해져 어색하게 삐그덕 대는 몸짓으로 집사람 주변을 배회하며 집안일을 거들었다. 집사람이 내가 종종 건네는 질문에 간간히 대꾸를 해주어 집  공기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 다행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리나케 엄마에게 달려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합동 포격을 가한 뒤 여러 가지 이유로 가뜩이나 자신감을 잃어가던 중년의 가장을 장렬히 전사시킨 후 회생 불가능의 길로 접어들게 할 수도 있었지만, 배려심 깊고 아량 넓은 그녀는 그리 하지 않았다. 내가 십수 년 바라보고 살아온 그 여자가 맞구나. 역시는 역시다. 팔불출 같지만, 나 참 결혼 잘했다.


나의 종알거림에 집사람이 간간히 대꾸를 해주자 나는 그것이 무언의 용서(?)인가 하는 착각을 했다. 그래서였는지 아이들을 재울 채비를 마치고는 자연스럽게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했다. 개운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한 고비는 넘었겠거니 싶었다. 밖에서는 집사람과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애들 할머니가 둘째 딸아이의 방으로 들어가자 집사람이 아이들을 거실에 남겨둔 채로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 해야 할 이야기가 남지 않았어?"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바로 앉으며 손으로 이불을 토닥여 자리를 만들었다.

"어. 해야지. 여기 앉아봐."

집사람은 잠시 서 있다가 이내 내가 평평하게 만들어 놓은 이불을 치워버리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래서. 이야기해 봐."

내가 집사람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집사람이 재촉했다. 무얼 이야기하라는 건지 몰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과를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해야 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오토바이를 사게 된 계기를 설명해야 하는 건가? 머릿속에서 서너 명의 또 다른 자아가 빠르게 회의를 주고받았다.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지난번에 크리스마스 선물 골랐다고 했잖아. 나는 그때 자기가 허락했다고 생각했고 자기한테 이야기하지 않은 건 미안한데 12월 25일에 이야기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어. 자기를 속이고 몰래 사서 타고 다니려고 했던 건 정말 아니야. 그럴 거였으면 내가 오늘 자기한테 보여주지도 않았겠지."

"이야기하지 않은 게 속인 거야. 나는 자기가 오토바이 산다는 말 허락한 적 없고, 자기 혼자 계획하고 자기 혼자 결정한 게 서운한 거야. 우리 집 이사 오면서 가전제품 바꾸자고 할 때 비싸다고 반대했던 자기가 정작 본인 취미를 위한 소비는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거고 이기적인 거야."

정확하게 대화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우리 둘은 위와 같은 논점으로 공격과 수비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대화가 길어지며 집사람은 격앙되는 감정으로 결국 눈물까지 흘렸다. 집사람의 눈물에 당황한 나는 서둘러 휴지를 가져와 눈물을 닦아주며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집사람의 마음이 나의 예상보다 더 많이 다쳤나 보다 생각이 들자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나는 집사람을 끌어안아 토닥였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다른 하려던 변명을 모두 무르고 미안하다고만 했다. 엄마가 보이지 않자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와 울고 있는 엄마의 얼굴과 나의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집사람은 부드러운 말투로 아이들을 내보내며 자신도 일어나 방에서 나가려 했다. 나는 집사람을 다시 끌어안고  한 번 미안하다고 애교를 부리며 화해의 뽀뽀를 청했지만 집사람은 고개를 돌려 응하지 않았다. 이럴 때 연하의 매력이 발휘되면 얼마나 좋을까? 집사람은 끝내 오늘은 싫다 하고는 아이들을 돌보러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싫다. 그럼 내일은 좋다인 거겠지? 긍정의 시그널을 받은 나는 한 근 정도 가벼워진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려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그때 집사람이 다시 방 문을 열며 말했다.

"어머님한테는 자기가 말해."

작가의 이전글 5. 출동하라, 슈퍼커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