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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Mar 07. 2024

8. 아내와의 첫 (족욕) 데이트

어영부영 꽥꽥이를 공개하고 난 후 매일같이 바깥 온도만 살폈다. 언제쯤 영상의 온도를 회복하는지 알 수만 있다면 기상청 담당자에게 뇌물이라도 돌릴 판이었다. 하늘은 쉽사리 나와 꽥꽥이의 데이트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연말이 지나도록 단 하루도 영상으로 올라가지 않았으니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출퇴근 길에 내 사랑스러운 애마를 눈으로만 훑으며 '곧 만나자' 다독일 뿐이었다. 집사람에게 소개도 시켜줬겠다, 엄마의 허락도 받았겠다 더 지체할 필요 없이 마음껏 달리기만 하면 되건만, 이길 도리 없는 날씨에 발목을 잡히니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기회는 '문득'찾아왔다. 종무식을 진행한 2023년 마지막 근무일 오후. 회사에서는 예전과 같이 두 시간 빠른 퇴근을 허락해 주었다. 일찍 집에 도착한 나는 며칠 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누그러진 공기에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아이들을 대강 단도리한 후 엄마에게 다녀오겠노라 말하곤 채비를 했다. 다소 덜하긴 했지만 그래도 동장군이다. 길 위에 언 채로 객사하기 싫거든 단단히 채비를 해야만 다. 지난번 출동할 때와 같이 겹겹이 껴 입었다. 머리엔 칼바람으로부터 얼굴을 가리기 위해 또 한 번 바라클라바를 씌우고 그 위로 헬멧을 얹었다. 급할 것 없마음으로 주섬주섬 천천히 준비하다 보니 20여분 정도의 긴 시간이 걸렸다. 장갑을 네 번이나 껴댔다. 장갑을 끼고 보니 헬멧을 쓰고 있지 않았고, 다시 장갑을 끼고 보니 핸드폰이 거치대에 없었고, 또다시 장갑을 끼고 보니 오토바이 열쇠가 집어 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오토바이를 탈 지능은 되는지 의심해 볼 일이다. 준비를 모두 마칠 때쯤 현타가 몰려왔다.

'야! 이 시간이면 차 타고 거의 도착했겠는데?'


다소 복잡한(아니, 멍청한) 과정을 겪었지만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시원했다. 그래. 이 느낌. 이 기분. 이거다! 내가 이 느낌을 위해 그동안 목숨과 이혼의 위험을 무릅쓰고 장기간 협상에 응했더랬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집사람에게 꾸지람 들은 시간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엑셀을 당겨 속도를 올려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잠바 지퍼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살갗을 아렸다. 여전히 손 끝이 가장 빨리 시려왔다.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내 손이 얼어붙어 손 끝이 떨어져 나간다 해도 지금의 이 자유는 누구도 빼앗지 못하리라. 내 이대로 적진으로 진격해... 응? 이건 아니고. 운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신이 몽롱해지나 보다. 이러다 잠이 드려나? 렇게 가는 건가? 아니지 아니지. 겨우 찾은 자윤데 이깟 추위에 홀라당 넘길 수는 없지. 정신 차리자! 잠들면 죽는다.


뭐 대충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머릿속에 지껄여대려니 집사람이 일하는 가게에 도착했다. 때마침 집사람은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려 가게의 문을 잠그고 있었다. 일이냐며 놀라 묻는 집사람에게 말없이 배시시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집사람은 나와 오토바이를 확인하고도 반가운 기색을 거두지 않았다. 성공이었다. 집사람이 내 손을 잡더니 나를 끌어당기며 족욕샵에 가보자 했다. 그녀는 이미 한차례 가게 근처에 있는 작은 족욕샵을 다녀와보았노라며 나와 함께 가고 싶다고 말했다. 족욕이란 게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녀가 원하니 나도 원한다. 나는 순한 양처럼 그녀를 따라 족욕샵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있는 옷가게에서 집사람의 발길이 멈췄다. 쇼윈도에 걸린 옷들을 슬쩍 훑더니 손가락으로 하나를 가리키며

"저거 귀엽다."

하고 말했다. 며칠 뒤 연말 모임에 입고 갈 옷을 고르는 듯 보였다. 이번에는 내가 아내의 손을 잡아끌어 들어가 보자 했다. 그곳에서 대략 10분 정도 아내는 마음에 드는 옷을 골랐다. 귀여운 니트와 조끼를 고른 아내에게 다른 것도 둘러보라 했으나 돈이 부담스러운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그러지 않았다. 어쨌든 빈손으로는 나오지 않았으니 나도 그녀도 마음 가벼웠다.


집사람과 함께 족욕샵에 들어가 나란히 앉아 족욕을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처음 온 나를 위해 알아듣지 못할 여러 가지 건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효소가 어쩌고 저쩌고 물의 알갱이가 어쩌고 저쩌고. 나는 집사람을 위하는 심정으로 집중해 들었지만 집중한 만큼 머릿속에 남지는 않았다. 아주머니가 해주시는 대로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집사람과 손을 꼭 잡았다. 우리는 결혼 전 둘 만의 데이트를 할 때처럼 깔깔거리며 족욕을 즐겼다. 내 옆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 여인은 여전히 사랑스러웠고, 그녀도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30분이란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발과 함께 몸의 다른 부위에도 땀이 맺히는 기분이 들 때쯤 족욕 시간이 끝났다. 사장님이 발을 서서히 정리해 주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역겨운 물체들이 물 위를 둥둥 떠다녔다. 언젠가 과학시간에 알 수 없는 용액들을 섞었을 때 보았던 그런 모습이었다. 사장님은 그 부유물들이 우리 몸속에서 나온 노폐물이라 설명해 주었다. 발톱의 때나 각질 정도가 떠있겠거니 생각했던 나에게 그 광경은 다소 충격적이면서도 혐오스러워 사진으로도 남기기 어려웠다.


내 안에 숨겨두었던 충격적인 모습의 노폐물을 눈으로 확인한 것만 제외하면 완벽한 첫 데이트였다. 꽥꽥이를 바라보는 집사람의 시선이 몰라보게 부드러워졌으니 앞으로의 데이트가 더 기대가 되었다. 봄바람아 기다려라. 내 곧 너를 맞으러 갈 테니! 머릿속에 그려지는 핑크빛 미래로 설렘이 잦아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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