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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 Dec 17. 2022

사바나 초원에 내리는 비처럼

교실 안의 코끼리

“담임 선생님이 어떻게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는 거니? 우리 나연이를 괴롭힌 학생을 두둔하더라니까.”


카페에서 만난 고모와의 이야기는 뜨거워 호호 불어 마시던 아메리카노가 식어가도록 계속되었다. 사촌동생이 내성적인데, 같은 반 장난꾸러기 한 명의 표적이 되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큰 괴롭힘이 아니고 이런 걸로 찾아가도 되는 건가 담임선생님이 어렵기도 해서 고민하면서 지내다가, 어느 날 딸이 울음을 터뜨리자 담임교사에게 상담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런데 속 시원하게 해결되기는커녕, 교사는 괴롭히는 아이도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라고 설득을 했다는 것이다.


젖병을 물때부터 봤던 착하고 세상 무해한 사촌동생이 학교에서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나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고, 담임교사의 태도가 너무 미온적인 것 아닌가 생각했다. 교사라면 해당 학생을 따끔하게 교육시키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학부모를 안심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몇 년이 흐른 올해,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머님, 충분히 속상하실만 하지만 그 학생도 그렇게 나쁜 학생만은 아닙니다. 분명 좋은 점도 지니고 있는 학생이에요.”


모든 문제는 방과 후 교실, 화장실 등 교사가 없을 때 일어났다. 학부모는 그러니 그 아이가 영악하다며 분노했고, 즉각 변화를 요구했다. 문제 행동을 일삼는 학생에게 왜 채찍질을 하지 않느냐고, 다른 학생들이 피해를 본다고 채근하기도 했다. 그 아이가 바뀐 것이 없으니 선생님의 교육은 실패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무례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결국은 부모님의 속상한 마음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아이의 잘못된 행동은 바로 제지하고 반복하지 못하도록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쑥 폭력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고 규칙을 어기기도 한다. 화가 나서 표정 관리가 안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실에는 지적과 비난과 낙인을 내쫓고 들여오지 않을 것이다. 대신, 피해를 입은 학생의 속상함을 최대한 많이 들어주려고 한다. 학부모는 바뀐 것이 없다 단정했지만, 내 눈에 아주 조금씩 바뀌는 것이 보인다. 한 번은 변화를 잡아내어 그 아이의 일기장에 응원의 말을 적어주었다. 분명 지난 행동은 잘못된 것이지만 너라는 아이는 잘못된 것이 아니니, 선생님은 멋진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오늘 이러이러한 행동들이 아주 멋진 행동이라고 적었다. 그 다음날 일기장에 글 선생님이 쓴 거냐고, 선생님이 응원해주는 거냐고 와서 물었다. 그럼 당연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렇듯 좋은 성장은 다정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 아님 그 이외의 성무 성악설 같은 것이냐 같은 내적 논란은 한동안 줏대 없이 흔들리다가 이제 ‘인류는 선함을 지향한다.’에 점점 수렴하고 있는 중이다. 교사로서도 성선설을 믿어야 아이들 안에 선한 부분을 찾아내 아이들이 스스로 마주하게 할 수 있다. 즉, 내면에 스스로 성장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전제할 수 있다. 판단이나 지적을 통해 덕목과 가치를 일러주는 것을 견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보통 쉽지만은 않다.


우다다다다. 복도를 지나는 그림자가 초원을 가로지르는 코뿔소처럼 목을 길게 뺀 머리에 무게 중심을 잔뜩 싣고 달린다. 때로는 기린처럼 겅중겅중 달리기도, 가젤처럼 우아하게 달리기도 한다. 치타처럼 아슬아슬한 각도로 코너링을 하기도 한다. “딩동” 교무실에서 매의 속도만큼 빠르게 쪽지가 날아왔다. 저학년 아이들이 복도에서 달리는 소리가 교무실까지 들릴 정도이니, 위험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교실에서 지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좁은 복도에서 많은 학생들이 뛰니, 하루에 몇 번씩은 추돌사고가 발생한다. 뛰어다니면 다친다는 가사의 노래에 맞춰 다 같이 신나게 율동을 하고, 이해하기 쉽게 안전 교육을 했다. 아이들은 분명 큰 소리로 안전을 다짐했고, 수업은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환상의 티키타카였다. 뿌듯한 마음으로 쉬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곧, 화장실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절망스러움에 사랑하는 우리 반 친구들이 자꾸 다치니 너무 걱정되고 속이 상한다고 감정에 호소하며 이야기하자, 아이들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절대 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것도 효과가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복도에 나가면 초원을 달리는 또 다른 자아가 되어 학생으로서의 규칙은 리셋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의외로 밋밋한 방법이 나름 효과가 있었다. 타이밍을 잘 잡는 것이다. 급식실을 가기 전에 줄을 서고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하냐 묻고 아이들 스스로 답을 이야기하도록 했다.


“돌아올 때 복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죠?


“걸어서요!”


“복도에서는 어떻게?”


“조용히! 질서!”


복도에서 줄을 서고 있을 때도, 미소를 띤 채 반야심경을 외듯 조용히 “여기는 급식실이에요, 특히 미끄러우니 걸어 다녀요.”, “복도에서는 걸어 다녀요.”를 반복 읊조린다. 단순하지만 중요한 루틴이다. 누군가 교육은 콩나물을 기르는 것이라 비유했다. 어두 컴컴한 콩나물시루에 귀찮을 정도로 자주 물을 주어야 하듯, 아이들에게도 비록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지침일지라도 반복해서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어버리자마자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물처럼, 아이들을 향한 말들이 공기 중에 흩어진다. 콩나물의 백배쯤 되는 물이 시루를 통과한 어느 순간, 노란 대가리가 쑤욱 올라와 있을 테다.


사바나의 우기가 되면, 건조하던 초원에 한바탕 비가 내린다. 콩나물 사이사이로 무수히 쏟아져내린 물방울은 지구를 돌고 돌아 구름이 되어 시원하게 초원을 적신다. 말라가던 황색 대지에 푸릇푸릇한 생기가 돈다. 비가 한참을 쏟아진 후 자란 풀과 잎은 동물들의 살과 피가 될 것이다. 타이밍을 잘 잡은 말들이 아이들의 행동을 만들어 습관의 뼈대가 될 것이라 믿는다.


혹자는 고통 없이 성장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아이들이 너무 버르장머리 없이 큰다. 이 또한 정말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엄한 훈육과 체벌에 ‘복종’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버릇이 없어 보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많은 것들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기에 세상에 길들여진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위험한 것까지 당황스러운 행동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고통이 아예 없는가 하면, 아이들 나름대로 죄책감도 느끼고 두려움도 느낀다. 이것을 강제로 느끼도록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비난과 고통에 속에서 성장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직접 그 과정을 겪은 후 알게 된 것은, 상처를 품고 자라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었다. 무엇인 문제인지 인지하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느껴졌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은 느낌이었다. 비난과 지적은 빠르고 손쉬운 문제 해결처럼 보이지만, 썩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다.


교실은 끝없는 실패의 장이며 시행착오의 공간이다. 덜 성숙하기에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고, 때로는 더 날카롭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다른 교실의 아름다운 모습과의 비교하며 이상향과의 괴리에 괴롭고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환멸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저경력 시절 교사로서 자질이 없는 것 같은 내 모습에 다른 선생님이 맡았다면, 아이들에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존감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었다. 그때, 선배 선생님이 건넨 다정한 말이 마음에 콕하고 박혔다.


“괜찮아, 교사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낭만적인 문장이 아니라 철저히 합리적인 조언이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한 포기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다양하게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을 통제하며 완벽한 교실의 모습에 끼워 맞추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이들을 믿고 엉망진창인 교실을 조금은 견뎌내 보았다. 교육은 참고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배의 말에 담긴 다정함의 힘을 알았다. 선배의 다정함은 멋지고 세련된 방법으로 후배의 성장을 이끌었다.


습관의 뜰을 지나야 이성의 궁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교육학자 피터스의 말처럼, 일단 아이들은 많은 것들이 습관화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전에 이성적인 대화를 시도해봐야 효과는 미미할 확률이 높다. 생각보다 많은 비이성적인 것들이 필요한데, 습관의 뜰이라는 것이 있다면 사바나 초원처럼 넓어 생각보다 많이 물을 주어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진정한 성장은 속도가 느리더라도 내면의 단단함과 함께 성장하는 것, 그리고 다정함의 감각도 함께 배우며 성장하는 것이다.


https://maily.so/allculture/posts/9ce561f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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