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무렵 보일러가 안 돌아간 탓인지 집안이 썰렁하다. 밖은 회색빛.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다. 이런 날은 아침에 눈떠졌다고 벌떡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누운 자리 그대로 마른눈만 껌벅껌벅 한참을 발가락만 꼼지락 거리니 벌써 병원 예약한 시간이 임박했다. 이대로면 분명 지각이다.
부랴부랴 준비해서 지하 5층과 연결된 아파트 후문으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우리 집은 연식이 근 20년 된 경사가 꽤 심한 곳에 위치한 고지대 아파트다. 얼마나 고지대에 외진 곳인가 하면 밤늦은 시각 야간순찰 도는 경찰차가 쉬어가는 아지트로 삼았을 정도다.
거실 창문이 후문 가까이 나있어 본의 아니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매일 같은 장소에 빨강 파랑 점멸등이 반짝거리는 게 빤히 보이니 안 볼래야 안 보기도 힘든 일일 테다. 순찰차는 매일 밤 아파트 후문 바로 옆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터를 잡고 몇 시간여를 정차했다 간다.
고지대지만 나름 단지 내 평탄화 시공을 하고 지상주차 공간이 거의 없어 단지 안은 원칙적으로 차량 운행이 불가하다. 나는 보통 티 앱으로 택시를 부르고 후문으로 나가서 택시를 탄다.
띵-. 지하 5층 문이 열리고 급하게 튀어나가려는데 눈앞에 초록색 예약 네온 등을 켜고 주차돼 있는 택시가 보인다. 언제 도착했는지 이미 주차장 안에 들어와 입구 방향으로 차량 헤드를 돌려놓고 출차 준비까지 끝낸 상태다.
보통은 내가 밖에 나가 기다리는 편인데 벌써 와서 대기하고 있는 게 겸연쩍고 민망하다. 마치 전용 운전기사 딸린 기업 오너가 되어 리무진을 대령받은 듯 황송한 기분이다.
"안녕하세요!"
잰걸음으로 호다닥 괜히 평소보다 큰 목소리로 인사하며 택시에 올랐다.
차문을 닫고 앉자마자 강한 남자 향수 냄새가 확 끼친다. 알코올 섞여 휘발된 짙은 향이 밀폐된 차 안 가득하다. 베이스 노트가 묵직한 샌달우드다. 차갑고 건조한 바깥공기에 민감해진 코점막이 자극되니 나는 금방 기침이 날 것만 같다.
익숙한 냄새는 아니다. 보통 택시를 타면서 맡는 향은 대수롭지 않은 생활의 냄새 혹은 담배 냄새 정도였다. 오늘따라 택시가 낯설다. 그래 뭔 상관이야. 고린내가 나는 것보다야 낫지.
요새 택시는 이미 목적지까지 다 찍어서 호출하고 자동 결제로 요금이 지불되니 탈 때 내릴 때 인사하는 거 외에는 한마디 대화 나눌 일이 없다. 생면부지 낯선 사람과 하하호호 일상적인 대화 하는데 보기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나로서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자연스레 휴대폰에 머리를 처박고 새벽부터 온 광고 스팸을 지우고 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적막한 차 안에 조용히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예상치 못한 강한 향수 냄새에 고만 온 신경이 쏠려 택시 탄지 한참만에 귀가 열린 건가.
카카오 T 견장이 수 놓인 가디건을 단정하게 입은 택시기사는 다소 마르고 호리 한 체격이다. 귀밑머리께 새치가 보이긴 하나 그것 만으로 나이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하겠다. 인상이나 표정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왜인지 무심코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빨간불 정차 신호에 잠깐 멈춰서 있는데 어디서 끼익 끼익 쇳소리 마찰음이 난다. 짐짓 아닌 척 운전석을 훔쳐보니 택시기사는 손가락 악력기를 조이고 있었다. 잔잔하게 깔리는 클래식 현악음 위에 얹어진, 그 철제 스프링이 늘었다 줄었다 하며 내는 규칙적인 마찰음 소리에 나는 일순 머리가 쭈삣선다. 이 이질적인 일련의 조합들이, 차 안에 부유하는 낯선 공기와 파동이 어쩐지 불길하고 예사롭지 않다.
내 온 감각이 예민하게 날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