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각과 논리를 잘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며칠 전, 가장 가까운 친구로부터 애정 어린 조언을 들었다. "너의 지나치게 내밀하고 솔직한 생각까지 타인에게 모두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친구의 이런 말을 듣고, 그날 내가 친구에게 쏟아냈던 수많은 생각들을 다시 돌이켜보고 내가 여태 삶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과 소통했던 방법을 돌아봤다.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동네 친구가 하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친구에게, 한국의 미래가 특히 인구 구조의 문제 때문에 얼마나 암울할지, 그래서 한국의 성장이 얼마나 둔화될지 떠들었다. 더불어, 미국에서 깨달았던 한국 사회의 단점도 예시까지 들어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나는 한국에 22년을 살면서 내 주변에 성소수자 친구 혹은 지인을 직접 만난 적 없고, 장애를 가진 사람을 마주했던 기억도 없었는데 이게 곧 한국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폭력적인지 설명한다고 토로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일 년간 대학을 다녀보니, 그곳에는 일상에서 성소수자, 장애인, 정신질환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고. 실제로 내가 본 미국에서는 버스를 탈 때 버스 기사가 휠체어를 탄 손님을 위해 차를 세우고, 휠체어가 버스 안까지 진입할 수 있도록 경사로를 내려주고, 안전하게 벨트까지 채워준 뒤에야 운전석으로 돌아갔다며.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 장면을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매일같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면서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고, 그래서 나는 그들의 불편을 아예 깨달을 수도, 또 이해할 수도 없었다는 끔찍한 자각이었다고.
난 운이 좋게 장애를 갖고 있지도 않고, 성소수자도 아니라 한국에서 멀쩡히 살아갈 수 있지만 미래에 아이를 갖는다면, 그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을지 혹은 성지향이 나와 다를지 나는 어떤 장담도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며,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미래를 생각하면 늘 자신이 없어진다고 덧붙였다. 친구는 내 이야기를 가만 경청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 한국에서 살기가 정말 싫구나!"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선택된 표현들이 문제였다. 한국에서 살기 싫다는 게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한국에 관한 부정적 표현들을 여과하지 못했으니, 친구가 느끼기에 나는 한국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친구는 내게 말해줬다. 나의 이런 아주 솔직한 생각까지는 너무 다 말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냐고. 주변에 한국을 정말 좋아하고 한국에서 행복하게 인생을 꾸려나갈 꿈을 가진 사람이 들으면 상처받지 않겠냐고.
나는 그런 친구의 따뜻한 조언에 그만 양심을 쿡 찔리고 말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인생을 책임지고, 그래서 모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해한다고 주야장천 생각했던 내가 당장 나부터 나의 의견을 어떠한 배려도 없이 공격적으로 늘어놓기 바빴기 때문이다. 자기 확신이 강하고 냉철한 분석과 객관화된 생각으로 남들에게 나의 논리를 잘 전달한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나는 사실 대화의 기술이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다. 나의 이야기가 상대에게 어떻게 들릴지는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고, 내가 느끼고 생각한 점을 어떤 여과 없이 전달해도 모두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받아들일 것이라는 오만함은 나의 말에 힘을 실어 주지 못했다.
그보다 더 전에, 나는 친구가 어느 대학을 다니는지 모르고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했다. 치열했던 대학 입시를 성공적으로 끝낸 나는, 주변 친구들이 내게 어떤 대학에 합격했는지 먼저 말해주지 않으면 굳이 물어보지 않기로 스스로 합의했다. 친구들이 어느 대학에 붙었고 떨어졌는지는 내게 그 친구에 대한 어떤 판단도 주지 않는 구태여 필요하지 않은 정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하고 5년이 흐른 뒤까지 나는 그 친구가 정확히 어느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졸업했는지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친구와 만나면서 친구가 다니는 대학의 이름은 우리의 대화에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둘 다 서로가 학생이란 걸 알고 있고, 무엇을 전공으로 어떤 공부를 하는지도 알고 있으니 일상에서 굳이 내가 그 친구의 대학을 물어보지 않는 이상, 친구의 대학을 모르는 상태로 대화하는 게 놀랍지만 충분히 가능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는 내가 친구의 대학을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정도까지 와버렸다.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중요한 사실은, 종종 우리는 서로를 향한 질문에서 관심과 애정을 느끼고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친구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친구에게 학교를 묻지 않았고, 그 이유 역시 나만의 생각 안에 갇혀 친구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내가 친구의 대학을 모르고 있는데, 그게 별 문제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니 친구는 도저히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서운하다는 친구의 말에도 난,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고 그게 나의 방식이라고 여기는지 순전히 '나'의 입장에서 말을 쏟아냈다.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향적인 말은 그게 제아무리 합리적이라 해도 말의 기능을 잃고 소통을 중단한다는 걸 몰랐다.
친구가 용기 있게 꺼내준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 보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말로 전하는 이야기의 온도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한국이 싫고 미국이 좋았던 게 아니다. 해외로 나가보니 그전에는 모르던 것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되고 고민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으며, 그런 배움에서부터 성장할 수 있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때 도움이 된 건 여행보다는 직접 '살아보는' 경험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한국의 부정적인 면면들을 한번 제대로 뜯어고쳐 보겠다는 용기와 포부는 없으니, 그저 내 입에서는 한국이 이렇고 미국이 저렇다, 하는 피상적 단어들만 튀어나온 것이다. 자신의 생각도 스스로 완벽히 정리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뱉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해보지 않은 타인에게 무례한 공격성을 띄며 잔뜩 날카로울 뿐이었다.
친구의 대학을 모르기로 한 선택에 대한 나름의 이유는, 순전히 내가 만들어냈을 뿐인데 이 말을 그대로 친구에게 전달하는 실수를 범했다. 듣는 상대의 입장에서 나의 의견을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하며 나아가 공감까지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소통인데, 나는 그저 날 것의 말만 와르르 쏟아붓고 듣는 사람이 알아서 잘 이해하고 공감해 줄 것이라 으스댔다. 앞으로 사회에서는 나에게 애정이 없고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나의 생각을 전달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여실히 부족하다고 깨달았다. 어떤 말을 하고 싶다면, 상대가 나의 말을 어느 정도로 들을 수 있는 상태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상대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며 내가 전달할 생각을 정제된 언어로 잘 펴낼 줄 알아야 한다. 나와 완전히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똑같은 사고를 거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내가 하는 말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해석되고, 그래서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 데 치중된 이 사회에서, 제대로 소통하는 방법을 배워나가야 할 것 같다. 내게 가르침을 준 친구에게 정말 감사하다. 친구에게서 나의 문제를 깨닫고 고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인데,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나처럼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수 있다면, 내가 지금까지 저질렀던 수많은 소통의 오류에 대해 조금이나마 사과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