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25년을 일해도 열흘 휴가 내기 어려운 우리 엄마
영국에 살고 있는 딸을 보러 오려고 휴가를 내려다가 실패한 우리 엄마의 이야기다.
엄마는 서울의 빅5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25년을 넘게 일하고 있다. 엄마는 11월쯤에 나를 보러 영국에 올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휴가를 내려던 차에, 엄마가 근무하는 팀의 팀원이 육아휴직을 가는 바람에 인력 충원이 안 돼서 그때 휴가를 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육아휴직을 6개월 이상 신청하면 인력 충원이 이루어지지만, 그 이하로 신청하면 인력 충원 없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인데, 육아휴직을 신청하신 팀원 분은 6개월 미만의 짧은 휴직을 신청하셨나 보다. 이 말을 들었을 때도, 다른 것도 아니고 육아휴직인데 인력 충원을 안 하는 게 말이 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사유로 다른 팀원이 해당 기간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없는 건 또 말이 되나?
최근에는 또 병원의 운영상 적자 문제로 미사용 휴가에 대한 급여 지급이 안 된다며 모든 직원에게 휴가를 사용하도록 했고, 그래서 그냥 남는 날짜에 휴가를 다 신청해야 하는 웃긴 상황이 벌어졌다. 가족 카톡방에 정말 뜬금없는 일자에 엄마랑 아빠가 계속 휴가를 냈다고 톡을 보내와서 왜 그런가 했더니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영국에서 최저시급 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나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영국에는 카페 프랜차이즈가 서너 개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시급을 가장 적게 주는 카페네로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는 주에 25시간 이상 일하기로 계약했지만 여전히 정규직이고, 국가 공휴일 포함 연 28일의 유급휴가를 받게 된다. 카페에서 일한 지 3개월 차에 접어든 지금이 한창 여름휴가철이기도 하고, 난 8월 말에 한국에서 졸업식이 있어서 이미 휴가 신청을 해놓은 상황이다. 나는 주말을 끼워서 11일의 휴가를 냈고, 매니저는 곧바로 승인했다. 팀원 중 대만에서 온 친구는 8월 한 달을 통째로 휴가를 냈다. 물론 일을 할 때 최소한 필요로 하는 인원이 있기 때문에 팀원 모두가 같은 날짜에 휴가를 낼 수는 없다. 그래서 휴가 신청은 기본적으로 first come first serve, 즉 선착순이다. 이러나저러나 근무 연차가 몇 년이든 시급으로 얼마를 벌든 상관없이 보장된 연간 휴가일 내에서는 얼마간의 휴가를 내든 일찍 얘기하기만 하면 상관없다.
우리 엄마는 한 병원에서만 근속 연수 25년을 채웠고, 일하고 있는 팀 내에서도 당연히 올드에 속하지만 여전히 휴가를 길게 낼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가장 긴 휴가는 가족 여행을 위한 주말 포함 8일 정도의 휴가였다. 이번에 내가 한국에 가기 위한 11일간의 휴가보다도 짧다. 법적으로 보장되는 휴가 범위가 있어도 실질적으로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 자유도에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다. 일하고 있는 카페에서는 팀원들이 휴가를 가서 인력이 부족한 주간이 있으면, 다른 팀원들이 더 일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보통 다른 지점에서 커버를 와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페 운영에 필요한 정말 말 그대로 최소한의 인력보다는 당연히 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고, 그 안에서 근무 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절하는 식으로 해결하는 편이다.
단순 서비스직에 속하는 카페 일과 엄마가 일하는 병원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병원에서 필요한 전문 의료 인력은 고용부터 교육까지 걸리는 시간도 당연히 더 길고 채용 난이도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전반적으로 휴가를 대하는 양국의 인식 차이는 분명한 것 같다. 일반적으로 한국 회사에서 충분한 인력을 고용하지 않으려 하는 기조와 함께, 휴가를 한 번에 몰아 쓰는 게 어색한 문화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게 아닐까 짐작한다. 아무래도 런던은 워낙 세계 다양한 곳에서 온 이민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고, 브렉시트 이후 줄어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상당히 많은 주변 유럽인들이 근무하고 있다. 그 말은 애초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고향에 한 번 가려면 비행기든 기차든 타고 국경을 넘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긴 휴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를 이해해 주는 문화가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엄마가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만큼의 휴가를 내는 걸 거절당했다가, 갑자기 병원이 미사용 휴가에 대한 금전 보상을 하지 않겠다고 하며 안 된다고 했던 휴가 사용을 반강제로 하게 되었다는 사연은 영국에 있는 내가 듣기에는 조금 이해하기 어렵고 웃겼다. 뭐가 되었든 엄마는 어쨌든 휴가를 쓰게 되었고, 그 덕분에 날 보러 영국에 올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