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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현 Mar 26. 2022

너무나 후한 미국의 인심

세상에서 가장 좋은 환불 제도

청소기가 망가졌다. 돈 없는 교환학생 네 명이 살아가면서 항상 마트에서 가장 싼 것만 집어왔기 때문일까, $40 정도의 가격으로 사 온 진공청소기는 한 달만에 명을 다했다. 집안 대청소를 마치고 필터를 청소했는데, 다시 청소기를 조립하고 돌리려니까 계속 헛돌기만 하고 제대로 청소가 되지 않았다. 카펫이 잔뜩 깔린 집에서 청소기를 돌리지 않고는 단 며칠도 버틸 수 없었다. 꽤나 먼지에 둔감한 나도 집에 들어오고 나서 연신 재채기를 했다. 그러던 중 미국에 먼저 와있던 룸메이트가 마트에 한 번 전화를 해보자고 했다. 미국은 환불을 흔쾌히 해주기 때문에, 한 달 여가량 사용했던 청소기도 환불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거였다. 하지만 영수증도 없었고, 박스도 뜯었으며 물건은 사용감이 잔뜩 있는 상황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마트에 전화를 한 룸메는, 청소기를 결제했던 내 카드를 챙겨 들고 마트에 가 성공적으로 환불을 받아왔다.


청소기가 망가졌다고 얘기하니, 영수증도 요청하지 않고 카드정보만 확인한 뒤 취소해줬다고 했다. 제품을 열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환불을 해주다니!


토스트기를 교환받기도 했었는데, 사실 사용법이 미숙해서 고장이 난 건지, 뭔가 전원 연결에 문제가 있었던 건지 확신이 없었다. 혹시 몰라서 마트에 전화해 상황 설명을 하니, 교환해줄 테니 카드와 물건만 들고 오라고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새로운 토스트기로 식빵을 구워 먹었다. 물론 마트 직원은 토스트기 박스도 열어보지 않고 교환을 해줬다. 제품 자체의 문제인지, 우리가 망가뜨린 건지 최소한의 확인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소비자 입장에서는 정말 편하고 좋았지만 파워 한국인인 나로서는 이래서 장사가 되나 싶었다. 교환과 환불에 상당히 관대한 이 대륙은, 이것 외에도 생각보다 사람들의 양심에 맡기는 일들이 많다. 샌프란시스코에 놀러 갔을 때, 교통패스 3일권을 구매했는데 여행 내내 어떤 버스를 타도 패스를 검사하지 않았다. 사람들도 기사에게 인사만 건네고는 태연하게 의자에 앉을 뿐이었다. 홈리스들도 많은데 말이다. 하지만 버스에 홈리스가 탄다고 해서 신경 쓰는 건 한국인인 나뿐인 것 같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글을 통해 생각을 정리할 예정이다.


한국은 지하철과 버스를 탈 때마다 교통카드를 찍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지만 이곳은 뭐랄까, 랜덤게임 느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늘 표를 확인하는 기계나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들어와서 대중교통을 일단 이용하고, 어쩌다 검표원을 만나면 그제야 확인받는 시스템이었다. 아직 내가 동부를 가보지는 않아서 다른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단 서부 쪽은 이렇다.


환불과 교환이 이렇게 쉽다 보니, 소비에 고민이 없어진다. 옷을 살 때는 입어보고 사이즈를 확인하는 게 맞지만, 피팅룸이 없거나 기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일단 그냥 사고 나중에 환불받으라고 점원이 직접 안내해준다. 환불과 교환을 활발하게 해 줘서 소비자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거라면, 늘어나는 환불 재고 관리는 어떻게 하는 걸까? 사람들이 악용하는 경우가 있을 텐데, 오히려 소비를 권장하는 측면이 있어서 손해를 방지하는 걸까?


사실 생각해보면, 어떤 물건을    물건이  작동하는지, 뭔가 문제는 없는지 알아보려면 당연히 박스를 열고, 택을 떼고, 여러  사용을 해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환불 제도의 의미가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어쩌면 이 당연한 사실을 여태 생각해보지 못하고 그저 제도에 익숙해져서는, 미국에 와서야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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