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된 사람들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이 그린 상처받은 사람들
※해당 글에는 영화<혼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통 작업을 할때는 집중을 하기 위해 음악조차 듣지 않는다. 하지만 밤샘 작업을 해야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금방 졸아버리기에 옆에 영화를 틀어 둔다. 오늘 새벽은 남은 과제를 마쳐야 해서 간만에 밤샘 작업을 했다. 그리고 넷플릭스에 들어가 ‘혼자 사는 사람들’이라는 영화를 틀었다. 워낙 평이 좋은 영화이기 때문에 이미 대강의 줄거리와 일부 장면들을 알고 있었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냥 요즘 흔히 다뤄지는 ‘타인에 관심없는 현대인들’ 이야기겠거니 했다. 적막만 없애자는 생각으로 틀어둔 것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멍하게 화면을 응시할 수 밖에 없었다. 작품이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마치 주인공의 모습이 나를 보고 있는거 같았다.
사실 나는 소설을 읽지 못한다. 원래는 에세이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읽고 있기는 하다. 그 이유는 이들이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역경과 극복과정, 혹은 문제가 된 상황 그 자체는 좋은 글감이 된다. 그런것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장 불안할 수 밖에 없었던 나이에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 죽었다. 모든 것이 평범하게 흘러갔던 나날들이었다. 모든 것이 나를 속이고 있는거 같았다. 그녀가 죽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 후 모든 것이 나를 속이는것 같았다. ‘정상’, ‘평범’, ‘보통’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흔들린다는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관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속된말로 별 짓을 다했다. 하지만 극복하지 못했다. 정신이 무너지자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몸이 무너지자 사람을 만날 수 없었다. 사람을 만날 수 없어지자 정신은 고립되었다. 혼자 남겨져 결국 혼자가 되었고 기댈 곳 하나 없어 그저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역경을 마치 동기부여를 위한 에너지원으로 삼는다. 마음의 상처를 생채기 낫듯 극복해버리고 이때다 싶어 귀인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은 보란듯이 성공한다. 이 흔한 클리셰때문에 허구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겨버린다. 극복하지 못한 사람을 평범한 사람이 아닌 나약한 사람으로 치부하고 배제한다. 그렇게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혼자가 되는 것을 선택하고, 차가운 사람이 된다. 역경을 딛고 올라선 사람들의 이야기는 마치 왜 그렇게 살지 못하냐고 혼을 내는거 같았다.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극복하지 못한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지나는 항상 가장 높은 실적을 올리는 우수한 직원이다. 지나는 아픈 어머니를 여의고 혼자 살아가고 있다. 17년전 다른 여자와 바람이나 떠난 아버지는 반성을 한다며 돌아왔지만 지나에겐 그저 상처를 준 인물일 뿐이다. 대게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히키코모리와 같이 비정상적인 삶의 형태로 그려진다. 실제로는 지나와 같은 워커홀릭이 많다. 그들도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일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일은 대게 돌발상황을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다.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상처를 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일은 사람에게 어떠한 감정적인 반응은 원하지 않는다. 상처입은 사람에게 감정이란 우울과 불안, 분노 뿐이기에 대게 그 조차 가지기를 포기한다.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게 편하다. 그래서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공허하다. 지나가 줄곧 무표정인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영화도 지나가 상처를 극복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뻔한 스토리지만 가장 놀란 부분이다. 영화는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을 대단한 방법으로 그리지 않았다. 감정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감정도 학습이 필요하다. 감정은 씨앗이다. 누군가가 심어주지 않으면 피어나지 못한다. 부모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부모가 심은 씨앗이 자라나 만들어진 숲이 아이들의 삶을 결정한다. 부모가 따뜻한 감정을 심어준 아이들의 숲에는 예쁜 꽃이 피어나고 벌때가 모여든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좋은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래서 이들은 대게 인간관계로 상처를 입지 않는다. 하지만 지나와 같이 혼자가 되길 선택한 사람은 부모로부터 이러한 따듯한 감정의 씨앗을 받지 못했다. 관심을 받더라도 그것은 대게 차가운 사랑이다. 그래서 이들이 가진 숲은 차갑고 공허한 숲이다. 그 누구도 이 숲에서 살 수 없다. 혼자가 되길 선택한 사람들이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단지 이 안에서 사람이 살아갈 수 없고 살게 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인간관계란 겪지 못한 상황에 대한 공포이다. 그래서 지나가 수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 하는지, 반응해야하는지 몰라요.”
씨앗이라는 것은 굳이 심어 줘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들은 바람을 타고 날아올 때도 있다. 공허한 숲에 꽃을 피우는 것은 이렇게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 씨앗들이다. 부모가 아니라도 감정의 씨앗은 심을 수 있다. 상처입은 사람은 경계가 심하다. 그들에게 사람이란 상처를 주거나 혹은 무언가를 해주길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코 자신의 숲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바람은 막을 수 없다. 옆집 사람이 지나에게 건낸 ‘담배를 성냥으로 불을 붙이면 연기가 다르대요’라는 말, 그리고 수진의 존재는 바람이다. 이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지나에게 말을 건낸다. 이 바람이 가져온 씨앗은 지나의 차가운 숲에 심어진다. 그리고 싹을 틔운다. 혼자가 된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주인공을 변화시키는 귀인이 아니다. 정말 별거 아닌 말 한마디다.
하지만 이것이 이들의 인생이 그대로 행복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혼란스러워 진다. 따뜻한 공기와 차가운 공기가 만나면 안개가 끼고 태풍이 만들어 진다. 이들의 숲에도 혼란이 드리운다. 주변 사람들에게 모질게 굴게된다.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다가오는 가장 첫번째 인간관계는 ‘이별’이다. 바람 또한 사람이기에 싹이 트고 서리가 내리고 꽃이 필때까지의 긴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처입은 사람이 겪는 첫번째 인간관계는 따뜻한 감정을 심어준 사람과의 이별이다. 이 이별을 어떻게 대할지에서 결국 혼자가 될 것인지 아님 함께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지나가 수진에게 한 이 대사이다. “그냥 제대로된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이 말의 이면에는 ‘사실 나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었어요. 당신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당신과 제대로된 이별을 하고 싶어요’라는 말이 있었을 것이다. 끝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며 극복의 시작이다. 모든 상처의 치료는 상처를 제대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영화는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마주하는 과정이 아주 현실적으로 전개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극복의 과정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는 처음이었다. 이는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려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지나는 나였다. 늘 무표정, 어두운 옷만을 입고 다닌 나에게 선뜻 다가올 사람은 없었다. 후배들도 나를 항상 무섭고 어려운 선배라고 기억했고 선배들 또한 어련히 알아서 잘 하는 애라 여기며 필요할때만 말을 건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무슨 배짱인지 내게 먼저 말을 건냈다. 같은 수업을 듣고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리고 계단에서,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그 사람이 내게 건낸 말들이 내가 처음 겪은 무심하고도 따뜻한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을 의심했다. 호감이 생길 쯤에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대할 준비가 되었을 때는 이미 멀어진 후였다. 내게 온 첫번째 인간관계도 이별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보냈다. “술한잔 같이 하자고 말하고 싶었어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