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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우씨 Jul 18. 2020

믿음에 관하여 - 애드 아스트라

영화플레이리스트 #09


이 영화는 바벨탑을 ‘수평’으로 쌓아간 남자, 그리고 그걸 무너뜨린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애드 아스트라'의 결말 내용이 포함된 글입니다.


우리 시대에 신(神)이 미움을 받는 건 ‘연락 잘 안 되는 애’가 연애 상대로서 박한 평가를 받는 것과 근본적으로는 같은 원리인 게 아닐까. 침묵은 금이라는 표현은 모두가 알지만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다. 침묵은 금(gold)이 아니라 관계에 선을 그어버리는 금(line)이다.


우리는 왜 연락에 집착할까? 연락이 잘 되지 않는 상황, 다시 말해 상대방의 침묵은 ‘선톡’을 보낸 사람을 내적으로 붕괴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귀한 딸, 귀한 아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류의 프로파간다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내면붕괴의 쓰라린 기억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내키진 않겠지만 상대방의 답장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각자의 순간을 떠올려보자. 말로는 “걱정되니까 연락해”라고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 사람이 답장하지 않는 이유 그 자체보다는 자신의 우선순위를 궁금해 한다.


내 카톡이 씹힌 이유보다 더 궁금한 건 ‘내 카톡만 씹혔는지’ 여부다. 나는 몇 번째일까? 결코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이 쌓여가는 동안 자존감은 수증기처럼 증발한다.



고통이 심해지면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더 자주 해달라는 사인이 전달된다. 어느 정도의 공감능력과 성의가 있는 상대방이라면 잠깐은 달라진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연락의 성향이라는 것도 결국 그 사람 고유의 특성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원래 패턴으로 회귀하게 마련이다.


선톡자는 다시 절망에 빠진다. 나에게만은 다를 줄 알았는데…. 아무리 바람기가 심해도 자신에게만은 다를 것이라는 착각의 끝이 항상 절망인 것과 똑같은 진행이다. 지옥은 반복된다. 그래서 지옥이다.


다시 신 얘기로 돌아와 보자. 연애상대의 침묵만이 우리에게 절망을 주는 건 아니다. 신의 침묵이야말로 긴 시간동안 인류에게 꾸준한 절망을 안겨왔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제작된 마틴 스콜세지 영화 '사일런스' (2016)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어느 농부가 신을 위해 순교한 이후에도 안마당이 고요하고 매미와 파리 소리가 평온하게 이어지는 것에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해놓고는, 그가 자신을 위해 죽었음에도 심드렁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님, 당신은 왜 잠자코 계십니까? 당신은 왜 언제나 침묵만 지키고 계십니까?”


그렇긴 해도 미약한 인간 나부랭이보다야 신을 믿는 편이 훨씬 더 ‘믿음직’한 일이라는 생각은 든다. 모자란 인간의 뜻으로 헤아릴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믿고 조용히 기도를 올린다는 옵션이 마지막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불안의 공백을 메우는 것은 결국 믿음이다.


물론 이건 믿음의 대상을 잘 골랐을 때의 얘기다. 우리가 뭔가를 믿지 않고선 지탱될 수 없는 존재라면 무엇을 믿을지의 문제가 매우 중요해진다. 믿을 만한 걸 믿어야 한다는 얘기다. 만약 믿음의 대상이 너무나도 불완전한 인간이라면 어떨까. 아니 아예 외계인이라면?


‘애드 아스트라’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아버지 클리포드(토미 리 존스)가 위대한 우주 비행사라 믿고 살아왔다. 하지만 사실 클리포드는 태양계의 끝자락 해왕성에서 지적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에 반기를 드는 대원들을 몰살시킨 독재자였다. 그런 클리포드를 ‘손절’하면서도 정부는 그를 영웅으로 포장한다. 그렇게 믿는 편이 모두에게 그나마 낫기 때문이다.


클리포드의 모습은 지구 멸망의 날짜가 정해졌다고 믿고 교주에게 전 재산을 갖다 바치는 사이비종교 신도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지적 생명체는 ‘있는지 없는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있어야만 하는 것’이 돼버린다.


클리포드는 목숨을 걸고 우주를 건너 자신을 찾아온 아들조차 백내장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신세가 됐지만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놓지 못한다.


“그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앞에 있는 건 보지 못했다.”



지구를 구한다는 숭고한 목적 이전에 아버지를 찾겠다는 목표로 시작된 로이의 여행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아버지는 결국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우주의 한 점이 되어 사라지길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로 돌아온 로이의 모습은 홀가분해 보인다. 과거의 냉소적인 구름을 걷어내고 진심 어린 미소를 짓는다. 이 변화의 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제야 비로소 로이에게 ‘믿을 구석’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는 그저 훌륭한 분이었을 뿐 실체가 없는 위인전 속 인물에 불과했다. 그런 아버지의 신화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이끌어 왔지만 어딘가 바닥이 붕 떠있는 느낌을 받아왔던 건 아닐까.


아버지와의 만남은 그에게 절망을 줬겠지만 동시에 또 다른 시작점이 돼주기도 했다. 아버지의 실체를 확인했기 때문에 거기에 맞물려 로이도 입장을 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구에서의 어떤 것도 의미가 없고 아들조차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아버지에게 로이는 눈물로 고백한다. “그래도 아버지를 사랑해요.” 


바로 이 순간이 로이의 새 출발이었을 거다.


지구로 돌아온 그는 아내 이브와 다시 만난다. 그 사랑이 영원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로이가 돌아간 건 아닐 것이다. (이브가 사실은 ‘카톡 잘 씹는 애’일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영원한 것처럼 사랑할 때, 그렇게 믿을 때 그 사랑은 한 차원을 넘어 위대해질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이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믿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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