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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광 Jun 14. 2022

산막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드러난 몰골은 몹시 황폐해 보였다. 깊이 팬 주름살과 쩍쩍 갈라진 피부, 군데군데 검버섯이 피고 몸은 야위어 있었다. 온갖 행색은 가난이 꾹꾹 눌어붙어있어 어지간히 고생깨나 하고 살아온 듯했다. 

그를 보면 어두컴컴한 호롱불 아래에서 옛날 얘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귀를 쫑긋하게 했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엉뚱한 길로 빠져나와 당신의 곤고한 세월을 더듬거리며 훌쩍였고 호롱불 옆으로 언뜻언뜻 나무처럼 말라가는 할머니의 모습이 유난히 슬퍼 보였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눈물샘이 말라버린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가슴속에 쌓아둔 슬픔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는 평소에도 세상에 드러나고 싶지 않은 듯 그늘을 즐기며, 큰 나무들 틈에 숨어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다. 게다가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은 탓에 낮은 툇마루는 온갖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이어온 산막이었다. 그 옆으로는 우람한 은행나무 네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데 마치 산막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단단한 가지를 펼치고 있었다. 참 오묘하게도 볼품없어 보이던 산막은 은행나무들 때문에 오히려 고귀하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거친 세월을 이긴 재야의 고수들이 한 울타리에 살다 보니 그들만의 유대감이 한층 끈끈해진 듯했다.      

읍내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종종 산바람을 쐴 겸 나들이를 오거나 나물을 캐러 오기도 하는데 그들에게는 산막의 존재가 특별해 보였다. 세상에 이런 건물이 아직 남아있느냐며 기억 저편의 옛날을 만나듯 반가워했고 오밀조밀 남아있는 생활 흔적들을 보며 탄성을 지르곤 했다. 산막의 숨겨진 가치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산막 내부를 열어 보이거나 산막에 얽힌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꺼내어놓곤 했다. 오래된 건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점차 커지다 보니 나도 산막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산막은 원래 산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용했던 오두막이었다. 그곳에서 대를 이어 살았던 사람들은 매년 밤과 감, 매실을 수확해서 대처에 내다 팔았다. 그들을 통해 자식들을 키웠고 가족의 생계를 이어올 수 있었다. 대개의 과실 농사가 그렇듯 밤도 감도 젊은 사람들의 변화된 입맛을 사로잡지 못했다. 과일 농사가 쇠퇴하면서 사람들도 떠났고 산막의 명맥도 끊어졌다. 지금도 산언저리마다 그때를 기억하듯 누런 밤송이가 굴러다니고 군데군데 매화가 활짝 피었다. 

어떤 사람들은 산막이 너무 낡았으니 허물어버리고 차라리 새로 짓는 게 좋겠다고 조심스러운 권고를 하기도 했다. 지은 지 오래되었고 사람이 살고 있지 않으니 당연히 누추해 보였다. 그렇다고 당장 건물을 현대식으로 고친다거나 허물어버릴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건축가라도 세월을 안고 있는 건물은 다시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것은 낡은 것이라고 밀어내고 새것만을 품으려 한다면 세상은 낯선 것들만 득실거릴 것이고 사람들은 근본도 모르는 삶 가운데에서 점차 외로워질 것 같았다.     

산막은 비어 있지만 그 속에는 멈춘 듯한 세월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기둥마다 그을린 세월의 때도 창호문의 녹슨 손잡이에도 모진 삶을 부여잡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머물러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안을 엿보듯 삐걱이는 부엌문, 어머니의 시간인 듯 그을린 아궁이, 유행을 새긴 찬장의 문양들과 세월에 갇혀있는 그릇들, 보이는 것들 속에서는 보이지 않거나 까마득히 잊혔던 기억들이 불쑥불쑥 떠올랐다. 그 시절이면 당연한 것처럼 달고 살았던 가난이 어른거렸고 생활은 불편했지만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튼실한 마음을 키워주었다. 고무신이 아니라 운동화라서, 보리밥이 아니라 쌀밥이어서, 허리에 매는 책보가 아니라 어깨 가방이어서 몹시 신나고 행복했던 날들이 있었다.

요즘은 지극히 평범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때는 어쩌다 한 번 주어졌던 특별한 것들이었다. 현재와 산막이 지나온 세월의 간극은 그쯤에 멈추어있었다. 누구도 그때의 시간을 요즘의 시간과 섞을 수 없었다. 흐르는 시간의 결은 서로 달랐고 느끼는 질감도 달랐다. 지금은 온전히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지만 산막을 통해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기억들을 생생하게 되돌릴 수 있었다. 아무리 견디기 힘들었던 일도 세월을 지나고 보면 아름답고 대견스러운 일로 바뀌어지곤 했다. 진정한 행복이란 어느 날 갑자기 큰 걸음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빗물이 바위를 뚫어내듯 수없이 반복되는 잔걸음 끝에 오는 듯하다. 지금도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찾아 산골짜기마다 속속 찾아들어 살고 있다. 나무들로 울창했던 자리에 집이 생기고 슬그머니 끼어든  듯 푸른색 창고가 낯설다. 크고 현대적이지만 쉽게 마음이 가지 않는다. 어쩌다 텃밭이 딸린 기와집 하나를 만나면 읍내에서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그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쉽게 변해가는 것들 가운데에서 오래된 것들이 더 새로워 보이고 그나마 가벼워진 세상의 중심이 바로 세워지는 듯하다.       

산막은 낡았지만 근간을 이루는 뼈대와 서까래는 아직도 더 많은 세월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하다. 수많은 것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가는데 산막은 아직 꼿꼿이 버티고 있다. 옳은 일이라 생각하면 누구와도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대쪽 같은 어른을 닮아있다. 산막도 그쯤의 세월을 견뎠으면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된 것이다. 누구도 그의 차림새가 허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흠을 잡거나 흉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산막으로 인해 산의 존재감은 더 깊어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당장 내가 할 일은 산막의 마루에 앉아 세상의 무거움을 덜어내고 가끔씩 자라는 풀을 베어주거나 쌓인 먼지를 청소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듯하다.

봄이면 산막 마루에 앉아 은행나무 아래에서 나물을 뜯는 사람들의 수다를 듣는 일도 앞산에서 새싹이 움트는 모습을 바라보거나 연초록이 초록으로 바뀌는 산을 마주하는 것도 내 인생의 행복을 주워 담는 시간이 된다. 여름이면 짙푸른 나무들의 숨결을 느끼고 가을이면 황금빛 은행잎들이 휘날리는 모습도 변치 않고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자연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내놓는 근사한 작품이며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진심 어린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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