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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광 Jan 18. 2023

'이건 우리 식이 아니야.....'

이장선거

       “아아! 주민 여러분! 오늘은 마을 정기총회가 있는 날입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길가의  낡은 전봇대에 매달린 확성기들이 저마다 요란한 소리를 뿜었다. 소리와 소리가 부딪히면서 잠들어있던 산촌을 흔들어 깨우듯 쩌렁쩌렁 울렸다. 소리는 바람을 타고 이 산 저 산 그 너머에 있는 골짜기까지 춤을 추듯 내달았고 집안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한바탕의 소리들이 신호탄이 된 듯 텅 비어있던 골목에는 하나둘씩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마다 추위를 뚫고 회관을 향해 걸어오거나 간간이 낡은 트럭을 몰고 오기도 했다. 윗 골짜기의 성불사 주지 스님도 월출재 아래에 사는 도사님도 육판골 천문대장도 속속 마을회관에 얼굴을 내밀었다. 산촌 사람들은 한 마을이지만 서로 다른 골짜기에 터전을 잡고 살았고 평소 산으로 가려진 다른 골짜기의 소식을 궁금해했다.  사람들의 출현으로 횅하던 골목에 점차 훈기가 돌았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선 채로 이야기를 나누며 반가움을 전했다. 추위 때문에 묵혀두었던 이야기 속에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낸 외로움과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그들은, 자연과 어울려 살며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고  종종 멀리  떠나온 바깥세상일을 궁금해하기도 했다.


마을 앞으로는 오래전부터 두 개의 물줄기가 흘렀다. 먼 도솔봉 골짜기에서 발원한 물과 월출재에서 시작된 물이 마을을 감싸듯 흘러와 마을 입구에서 만났고 함께 읍내를 향해 흘렀다. 양안을 흐르는 계곡의 물줄기는 한 마리의 새를 닮아있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조령리였다. 가끔씩 새의 부리를 닮은 지점에 물이 마르자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물이 고이도록 보를 만들어 새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었다. 새가 힘차게 살아가도록 배려해 주는 것, 그것이 마을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오늘  마을 회의의 주요 안건은 새로운 이장을 뽑는 일이었다. 한 해 동안의 마을 살림을 어떻게 꾸려왔는지 이장의 긴 설명이 끝나고 곧 신임이장을 뽑을 순서가 되었다. 예전과는 달리 면사무소에서 나온 직원이 투표함과 투표용지를 챙겼다. 이장 후보들의 출마 소견이 이어졌다. 이장을 뽑는 데에도 복잡한 절차를 걸쳐야 하는, 전에 없던 새로운 풍경이 낯설었다. 이른 시간부터 회관 방에서 막걸리를 한 잔 걸친 여든이 훨씬 넘긴 어르신은 선거의 낯선 분위기를 참아내기 힘들었던지 좌중을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자랑거리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껏 마을 이장 뽑는데 선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네! 주민들이 뜻을 모아 한 사람을 천거하면 곧바로 이장이 되었지! 한 마을에서 서로 얼굴 쳐다보고  의지하며 살아온 사람들끼리 내편 네 편 가르는 모습이 좋아 보이질 않아! 그러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등을 돌리면 어찌 살 텐 가?”

어른의 진솔하지만 다소 무거운 이야기는 실내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한마을에 모여 함께 산다는 것, 특히 깊은 산촌에서 이웃끼리 서로를 의지하며 사는 것이 여느 도시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일처럼 여겨졌다.

“이건 우리 식이 아닌 듯해! 이 자리가 누구를 이기기 위한 싸움터가 아니지 않은가? 누가 한 사람에게 양보해 주면 좋을 것 같네만.....”

사람들은 어른의 젊잖고 간곡한 요청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지만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장단을 맞추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출마를 결정한 사람들은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며 서로 자신만이 적임자임을 주장할 뿐  누구도 물러설 뜻이 없어 보였다. 상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긴 세월 동안 이어져왔던 마을의 고유한 전통과 선한 정서는 힘을 잃고 뒷전으로 밀렸다.   사람들은 갈수록 사나워지는 낯선 풍경과 낯선 생각들에 어지럼증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마을회관 건너편에 있는 300년을 훌쩍 넘긴 팽나무를 바라보고 산다. 봄이 오면 고목에서 돋아나는 새싹들의 눈부신 모습을 바라보며 용기를 얻고 산맥을 이루듯 펼쳐진 가지들에서 힘차게 지나온 시절을 읽어내곤 한다. 해마다 그들이 이루어내는 장엄한 역사 앞에서 고도한 문명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가?  인간의 나이보다 훨씬 고령인 나무가 마을의 중심이 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자랑거리가 된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이 죽으면 큰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참다운 삶의 경험과 지혜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긴 세월을 거치며 군더더기나 쓸데없는 것들이 씻겨나가며  단단한 알맹이로 남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큰 어른이 살아온 지혜와 진심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짠해진다. 단순히 세월이 변한 탓으로 돌리고 싶지만 개인 위주의 문화가 점차 공동체의 아름다운 문화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닐까 염려된다.  예전에 비해 간편해지고 쉽게 얻어지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세상이란게 삶이란게 하찮아 보인다. 이러다 인간이란  존재마저도 잘것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건 우리 식이 아니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무심하게 살아가는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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