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과 영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빌리 Feb 17. 2024

책은 나의 빚

애잔한 책 다시 읽기

많은 사람들이 연말연시에 정리를 한다. 옷장도 정리하고 먼지 쌓인 책장도 정리한다. 새해 준비 마니아인 나도 집에 있는 작고 귀여운 책장을 연초에 정리했다. 책장이 작다 보니 읽으려고 했던 책과 시리즈 물(슬램덩크)을 우선 꽂아두고 쫓겨난 책들은 커다란 IKEA 백에 가득 쌓아뒀었다. 버리기는 아쉽고 애매한 책들 집합. 책장을 이 방 저 방 옮길 때마다 IKEA 백도 짐짝처럼 옮겨 놓았는데, 이번 새해 결심으로 애매한 책을 모두 팔아버리기로 했다. 

정리의 시작은 추억 떠올리기가 아닌가. 하나하나 먼지 쌓인 책을 펴가며 읽는데, 애잔한 감정이나 진한 감동이 다시금 느껴지는 책도 있고, 당시 유행을 좇는 내용이거나 가벼운 책들도 있었다. 일단 소장가치가 없는 책들만 골라내어 서점 앱에서 중고 거래 바코드를 스캔했다. 1000원, 2000원씩 쌓인다. 비싼 금액은 아니지만 묵혀있던 시간과 공간을 덜어내는 느낌이라 한결 개운해졌다. (총 17500원 벌었음!) 대부분 포장하고 택배 상자에 넣었으나 버리기에 애잔한 책들이 조금 남았다. 제목도 생경한 남겨진 책들을 보니 습관적으로 새 책을 사는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술 취해서 책을 주문한 기억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올해 새로운 결심을 하는데 바로~ 호기심으로 책을 사는 것은 그만하고, 


이 책들을 한번 더 읽고 버리자는 것이다! 

그렇게 빼놓은 책만 12권... 대충 올해 읽을 책은 다 확보했다. 이렇게 야심 찬 애잔한 책 다시 읽기를 시작했다. 




15년 전의 부채

묵혀둔 책을 보다 보니 오래전 같이 읽었던 '경제 저격수의 고백'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잔잔하고 사실감 넘치는 문체에 내용도 신선하고 흥미진진했었다. 그 특이한 제목도 생생하다. 책이 주었던 아련한 감상을 상상 속에서 곱씹은 지 반나절, 감상이 목 끝까지 차올라 결국 새해 결심을 지키지 못하고 주문해 버렸다... 이틀 만에 받은 책은 옛날 모습 그대로 무거운 양장본 커버가 종이로 덮여있었다. 커버를 벗기고 나니 녹색에 금박으로 글씨를 박은 표지가 나왔다. 이 익숙한 커버는 내가 대학 때 들고 다니며 보던 그 모습이었다. 


이쁜 표지의 '경제 저격수의 고백'


그 표지를 보는 순간 생각이 스쳤다. 대학 때 빌렸던 도서 열람 목록을 다시 볼 수 없을까? 대학 때 어떤 책을 봤었는지 보고 싶었고, 내 순수한 가슴에 단비를 내렸던 책들도 다시 읽고 싶었다. 나는 무작정 학교 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학번과 비밀번호로 로그인했다. 없는 계정이었다.(당연) 다음 날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설레는 마음으로 중앙도서관에 전화를 했다. 열람팀에서는 친절하게 전화를 받았다.

저 10년 전 졸업생인데 혹시 제 도서 열람 기록을 받아볼 수 있을까요? 

담당하시는 분은 내 본인인증 후 연락처와 이메일주소를 물어보시곤 쿨하게 전화를 끊으셨다. 그리고 다음날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대학 시절 빌렸던 모든 책 목록을 메일에 첨부하여 보내주셨다. 목록은 옛 추억 마냥 기쁘고 아련했고 나는 몇 번이고 천천히 음미해 보았다. '경제 저격수의 고백'은 1년 간격으로 2번이나 빌려봤었다.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시작한 대학 생활에서 나는 다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독서를 선택했었다. 학창 시절 내내 책을 가지고 다니려고 노력했다. 신문이나 강의를 들으며 추천받은 책을 읽기도 했고, 책 안에서 언급되는 다른 책을 쌓아놓으며 목록을 채웠었다. 이번에 받은 도서 열람 기록엔 나의 대학생활의 절박함이 묻어있었다.

 

모든 분야를 다 섭렵할 듯한 목록




부채 상환

오늘 출퇴근하는 가방 속에도 덜컹거리는 책과 커피 텀블러가 들어있었다. 몇몇 책 아랫부분은 흘러나온 커피로 얼룩져 있다. 이런 독서에 대한 강박은 물론 날 괴롭혔지만 또 반대로 책을 한 권이라도 더 읽게 해 줬다.

책을 읽는 건 어떤 도움이 될까. 독서는 남의 의견과 생각을 듣는 것인데 나에게 다른 사람의 말을 새겨듣게 해주는 습관을 만들어 줬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마음속에 혼자 견고하게 키워오던 상처도 꼭 열등감이나 패배감일 필요가 없다는 위로도 듣게 해 주었다. 이제 한걸음 멀리서 바라봐도 좋다는 것사람마다 다르지만 한 번은 겪게 되는 성장통일수 있다란 얘기도 해주었다.


오늘 '경제 저격수의 고백' 3회 독을 마쳤다. 다시 보니 어디에서 내가 흥미를 느끼는지 또 어떤 걸 좋아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요즘 작성 중인 독후감에도 추가해야겠다. 초등학교 때 쓰던 그 막막한 독후감은 아니고 와닿는 구절을 사진으로 찍고 후기를 간단하게 정리한다. 그 독후감 리스트는 17500원을 안겨준 판매한 책 목록으로 완성했는데, 이번에 받은 대학교 도서 열람 기록도 추가해야겠다. 


그리고 다시 읽어볼 애잔한 책들도 찾아봐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