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금요일이다. 불금 말이다. 거기다가 오늘이 11월 말이다. 다음 주에 일을 시작하려면 새 달이다. 거기다가 이제 점심을 먹은 오후다. 이달 마지막 점검을 하나 남겨두고 있다. 안전관리 스케줄을 잡은 표에서 마지막 하나의 색칠을 남겨 두고 있다. 이거 하나면 한 달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평온히 한 달이 지나가면 좋으련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마가 낀다. 엊그제 폭설이 그 예고였는지 모른다.
점심식사를 막 마치는데 두빛나노에서 전화가 왔다. 사무실 여직원의 목소리다.
“정전이 이상하게 되요. 공장에 2/3는 불이 들어오고, 1/3은 안 들어 와요. 1층이 그렇고요, 2층은 1층의 반대에요. 1/3이 들어오고, 2/3는 전등이 안 들어와요. 어떻게 된 거지요? 빨리 와 주세요.”
“예, 알았어요. 3시 정도에 갈게요.”
전화를 받으면서도 반불이다 싶었다. 3상의 전기를 받는데, 한 상이 끊어져서 결상이 된 것이다. 반불이라면 어느 한 판넬에서 한 선이 끊어진 것인지, 아니면 저압 전체가 그런 것인지는 가 봐야 한다.
가자마자 열화상 카메라부터 꺼냈다. 평소 점검을 오면 전신주에 달린 고압기기들을 찍었는데, 그 때와 열을 비교하기 위해서다. 역시 이상이 있다. 평소에는 변압기의 온도가 가장 높았다. 그런데 지금은 MOF(Metering Out Fit, 전력 수급용 계기용 변성기)의 온도가 가장 높다. 50˚C가 된다. 변압기가 20˚C도 안 된다. 거꾸로 되어있다.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저압의 전압계를 살폈다. 역시다. RS가 40V, ST가 315V, TR이 350V다. 틀림없이 한 상이 결상이다. 공장 내부의 판넬에 또 가 보았다. 이미 공장 창고에 들어서니 전등이 반은 희미하게 들어오고, 반은 아주 꺼졌다. 역시 판넬의 선간전압이 전압계의 숫자와 비슷하다.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대표에게 문자를 넣었다.
“두빛나노의 고압에서 반전압이 뜹니다. 전압계가 40, 315, 350V가 각각 뜨고, 열화상 카메라로 온도를 측정해 보니, MOF가 50˚C가 되고 TR은 20˚C가 됩니다. 제 판단으로는 MOF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
전압계를 찍은 사진도 첨부했다. 조금 있으려니까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부장님, 잘 들으세요. 먼저 사고가 나면 그 원인이 어디에서 발생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눈이 많이 와서 여기저기 정전이 많이 되니까, 수용가 안에서 사고가 났는지 수용가 밖에서 사고가 났는지를 먼저 찾으세요. 한전책임분계점 밖에 가서 COS(Cut Out Switch)가 떨어진 것이 없는가 보세요. 우리에게 들어오는 COS에 문제가 없으면 옆 공장에 들어가서 거기는 전압강하가 없는지 전압을 찍어 보세요. 거기도 나갔으면 더 멀리서 사고가 난 것입니다.”
“예, 알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MOF가 고장이 나면 COS가 세 개가 다 떨어집니다. TR이 고장이 나면 COS는 두 개가 떨어집니다. 그러니 한전책임분계점 주변으로 COS가 떨어진 것이 몇 개인지를 살펴보세요.”
공장으로 돌면서 반불상태를 살피다가 밖으로 나왔다. 도로가에 서 있는 전신주에 한전책임분계점이 있다. 가까이 갔다.
“와, 있다.”
COS가 하나 떨어져있다. 두 개도 아니고, 세 개도 아니고, 단 하나가 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대표의 말에 의하면, MOF나 TR같은 우리 수용가의 고압기기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수용가의 ASS(Auto Section Switch, 자동고장구분개폐기) 아래에 있는 PF(Power Fuse, 퓨즈)도 멀쩡하게 살아 있다. 저압에서 사고가 있었다면 ACB(Air Circuit Breaker, 기중차단기)가 떨어졌을 텐데, 반불이 들어오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니다. 일을 정확하게 하자면 고압을 전부 내리고 고압기기를 전부 점검을 해야 한다. ASS, MOF, TR을 일일이 메거로 점검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기기에서는 일단은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갑작스런 폭설로 인한 사고라고 여기고 한전에 탈락한 COS를 올려 달라고 요청을 했다.
한전에 전화를 했다. 30분 후에 도착 한단다. 난 그 사이에 전기가 다시 들어오면 저압 기기들이 파손되지 않도록 준비를 했다. 공장에 들어가서 모든 판넬의 메인은 내리지 않고, 수배전반 저압 메인판넬에 가서 저압 차단기를 모두 내렸다. 그리고 ACB를 내렸다. 그리고 우리 전기 인입구인 ASS를 내렸다. 한전에서 전기를 넣어 주면 내린 역순으로 올려 주면 된다.
두빛나노 공장에서는 오전부터 일을 하지 못했단다. 오늘 출근 전에 기숙사에서 일어나 나올 준비를 하던 직원이 밖에서 ‘퍽 퍽’하는 소리를 들었단다.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출근을 해서 불을 켜보니 반불이더란다. 컴퓨터도 켜지 못하고, 모타도 안 돌아가 물도 쓰지 못하니까, 작업이 안 된다 싶어서 직원들을 다 돌려보냈단다. 밖에는 차가 다니는 길은 치워졌지만, 길 가로는 아직도 무릎 높이만큼 눈이 쌓여있다. 가는 눈이 오락가락하느라고 해는 볼 수 없다. 바람이 심하지는 않지만 공기는 제법 차다. 공장 문을 조금 열어 놓고 그 안에 들어가니까 한결 찬공기는 피할 수 있다. 공장장과 둘이서 조금 열린 문밖을 바라보고 서서, 한전 작업차량을 기다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도 신고한지 30분 안에 온다잖아요. 이거 엄청 빠른 겁니다.”
“맞아요. 제 사촌이 미국에 가 있는데, 이런 정전이 한번 나면 일주일을 넘어야 복구가 된답니다. 인터넷 선 하나 연결하는데도 일주일이 걸린다더군요. 세월이 없데요.”
“금방 되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예, 공장은 월요일에 돌리면 되지만, 제가 여기 기숙사에서 생활을 해야 해요. 오늘 복구가 안 되면 여관에 가서 자고 와야 해요.”
그러는 사이 빨간 한전 바가지트럭이 도착했다. 둘은 주차장 끝으로 다가갔다.
“저기, COS가 하나 떨어졌어요. 폭설에 영향을 받았는가 봐요.”
“예, 여기 안전관리자님 싸인 하나 하세요.”
한전직원이 안전교육을 하고 24년 11월 29일에 전기를 올려 준다는 싸인판을 들고 다가왔다.
“수용가의 고압기기는 이상 없지요? 그럼 올려 드릴게요.”
“예.”
하고 돌아서는데, 바가지를 타고 올라가 COS 한쪽 고리를 리드봉에 걸고 막 끼우려던 직원이 리드봉을 다시 내린다. 아래서 바라보던 직원이 소리쳤기 때문이다.
“잠깐. 야, 고 아래 LA(Lightening Arrest) 좀 봐. LA가 끊어졌어.”
“예, 끊어 졌네요. 올리면 안 되겠네요.”
“고 위에 애자는 멀쩡한가 봐.”
바가지를 가까이 올린다.
“애자도 깨졌어요.”
싸인을 받은 직원이 내게 다시 온다.
“안전관리자님, 지금은 못 올리겠네요. LA 수리를 끝내고 연락하세요. 그러면 그때 올려 드릴게요.”
“아니, 저거 올 여름부터 파손돼있었어요. 여름 말에 우리 회사와 견적이 오가고 했거든요. 그때 고친 줄 알고 있었는데, 안 고쳤는가보네요. 곧 바로 고칠 테니까, 지금은 올려 주고 가면 안 돼요?”
“안 돼요. 애자까지 파손되어 있어서, 지금 전기를 넣으면 ‘퍽’해요. 지금 전기도 이것 때문에 끊어졌어요.”
한전 빨간 바가지트럭이 쌩하고 차를 돌려 가버렸다. 하는 수 없다.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대표는 회사에서 공사팀을 보내겠다고 한다. 날 보고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란다. 공사팀이 오면 안내를 해 주란다. 지금 와서 LA와 애자를 어떻게 구하느냐고 투덜거리던 대표가 30분 내에 공사팀이 도착 할 거란다. 공장장과 둘이서 이번에는 공장 봉고차 안에서 히터를 틀고 기다렸다.
뭐, 서로 여기를 떠날 수 없는 처지다. 맑은 하늘에 비행기가 내 뽑은 연기가 서로 만나듯, 교차하듯이, 공장장과 나는 초면인데도 한 지점에서 만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공장장이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18살에 이 업계에 들어 왔어요. 지금 환갑을 지냈으니까 40년을 넘게 일했어요. 이 공장도 김포에 있었는데, 여기로 옮길 때 나도 따라왔어요. 여기 온 지도 벌써 19년이 됐네요.”
“와, 여기다가 청춘뿐만 아니라 인생을 묻었네요.”
“지금은 공장장이지만, 여기서 굳은 일 다 해요.”
“그렇군요. 가족은요?”
“가족은 지금 광명에서 살고 있어요. 아내가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살고 있어요. 날마다 몇 번씩 통화만 해요. 주말부부로 떨어져 산지 20년이 되는데, 더 늙기 전에 못난 남편만 기다리지 말고, 친구도 사귀고 바람도 피우고 살라고 해도 싫데요.”
“바람을 피우고 살라고 했어요? 말도 안 돼요.”
“그래도 싫다 잖아요. 못 된 놈 만나서 끔찍한 일 당하기 싫다고 나 하나면 충분하데요. 고맙지요.”
“아들은요?”
“아들은 또 더 고맙지요. 내가 10년 전에 간이식수술을 받았어요. 다행히 간암은 아니라서 이식이 성공했어요. 아들이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나에게 간을 떼어 줬어요. 나는 아들을 낳고, 아들은 나를 살렸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회사차가 도착했다. 안과장과 짝을 이룬 김대리 팀이 도착했다. 요즘은 차가 좋아져서 바가지 붐대를 올리다가 균형을 벗어나려고 하면 부져 소리가 울리면서 붐대가 올라가지 않는다. 안과장이 차를 다시 댄다. 이번에는 붐대가 거의 1자로 설 때까지 안과장을 들어 올린다. 작업이 막 시작될 쯤에 내가 물었다.
“과장님, 몇 분이나 걸리겠어요?”
“한 30분이면 돼요.”
한전에다가 바로 전화를 했다. LA와 애자를 다 교체했으니 빨리 와서 COS를 올라달라고 전화를 했다. 이제 교체공사를 막 시작했으니, 30분이면 끝이 날 것이고, 한전 차가 멀리 있다가 오려면 30분은 걸릴 테니까, 바로 올려 줄 것으로 계산했다. 시간의 아귀를 맞출 요량이다.
“여기가 마장인데요, 앞으로 50분 후에 도착할게요. 일 끝나는 대로 바로 갈게요.”
그래, 그러자. 나도 30분을 당겨 말 했으니, 교체작업 끝나고 넉넉잡아 30분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사실 지금은 COS가 떨어진 이유를 알고, LA와 애자를 교체하니까 쉬운 셈이다. 고압기기를 점검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 주 일요일에 공병부대 숙소에서 COS가 떨어졌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는 어려웠다. 아내와 산책을 하다가 전화를 받고 바로 갔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다. 한전직원이 물었다.
“한전책임분계점에서 다른 전주로 건네주는 전선에 혹시나 나무가 걸려있지 않아요? 아니면 누가 전선을 건드린 흔적이 있어요?”
“없어요. 나무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요.”
“그러면 지금 COS 못 올려 줘요. 수변전실 내부 기기를 점검하시고 전화 주세요.”
큐비클 문을 여니까 PF(Power Fuse, 퓨즈) 2개가 밑이 빠졌다. 빨간 돌기가 나왔다. 이건 수용가 내부에서 사고가 나서 밖으로 파급되지 않도록 퓨즈가 끊어진 것이다.
거기는 군부대라서 일반 수용가와는 좀 다르다. 공병 숙소를 관리하는 관리관이 있고, 여러 군부대의 전기를 관리하는 관리관이 한 사람 더 있다. 숙소관리관이 전기관리관의 전화를 받고 퓨즈를 사러 갔다. 그 사이 난 전기를 다시 받을 준비를 했다. 여기 두빛나노처럼 고압 최 상단의 ASS를 내리고, 저압 최상단인 ACB를 내렸다. ACB 아래 저압 메인의 차단기를 모두 내렸다. 퓨즈를 갈려고 저압 판넬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절연저항을 측정했다.
여기는 벌써 두 달 전부터 내부수리공사 중이다. 4층 건물이 원룸인데, 전기는 모두 금속관공사를 했다. 참 잘한다고 생각했다. 각 층 중앙에 있는 EPS(Electric Pipe Shaft, 전기실)에 들어가 모든 단자의 절연저항을 측정했다. 문제가 있는 판넬이 있다. ‘바닥전열’이라고 붙은 차단기가 모두 절연저항이 없다. 절연저항이 없는 차단기는 모두 내려놓았다. 메인판넬에 와서도 각 단자마다 절연저항을 측정했다. 3개의 차단기가 절연저항이 아주 0이 나왔다. 이건 차단기에서 나간 선이 아주 땅에 꼽혔다는 뜻이다. 퓨즈를 갈고 전기가 들어와도 이 차단기를 올리지 못하도록 표시를 해 두었다.
그러는 사이 숙소관리관과 전기관리관이 도착했다. 내가 큐비클에 들어가 작업을 할 필요도 없이 전기관리관이 서둘러 점검을 한다. 먼저 퓨즈를 갈아 끼웠다. TR과 MOF에 연결된 선을 분리했다. 고압전기기기가 모두 분리된 상태로 만든 것이다. 이제는 메가로 절연을 또 측정한다. TR의 세 선 절연을 쟀다. 전기관리관이 묻는다.
“95㏁이 나와요, 안전관리자님 어떡할까요? 괜찮아요?”
“1000V로 놓고 쟀잖아요. 10㏁ 이상이면 되니까 괜찮겠는데요?”
MOF도 절연을 쟀다. 비슷하단다. TR과 MOF의 세 상을 찍어 보았다. 상간의 저항이 비슷하단다. 이건 모터와도 같은 이치다. R, S, T 세 상 중에 두 상을 돌아가면서 찍어 보면, RS와 ST와 TR의 저항이 얼마가 됐든지, 균형이 맞으면 정상이다. MOF과 TR도 마찬가지다. 세 상의 균형이 맞으면 고장이 아닌 것이다. 이걸 모두 측정한 다음에 한전에 전화를 해서 한전책임분계점 COS를 올린 적이 있다.
지금은 그런 작업은 필요가 없다. LA를 교체했고, LA를 받치고 있는 애자도 갈았으니, 원인을 규명하고 수리한 셈이다. 한전만 다시 불러 COS를 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약속한 시간이 되어도 오지 않는다. 20분은 더 지나서 전화를 했다.
“예, 안전관리자님, 작업이 늦어져서 못 갔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예, 알았어요.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 못 먹었어요.”
“아이고 어쩌나,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몇 시까지 올 수 있어요.”
“여덟시까지는 갈게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그 사이 우리는 저녁을 먹었다. 공장장과 둘이서 가까운 중국집에서 짬뽕을 한 그릇씩 먹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이번에는 회사 이야기를 했다.
“어때, 회사는 재미있습니까?”
“회사 사장님이 저를 아주 신뢰하지요.”
“그러겠어요. 가정을 떠나서 아주 회사에서 밤낮을 지내는 사람을 어떻게 나 몰라라 하겠어요.”
“그런데 불만은 있어요. 뭔가 하면, 사장이 자기 아들을 아주 중역에 포진시켰어요. 전문경영인을 둬야 하는데, 아들을 핵심에 앉혔어요.”
“맞아요.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회사들이 회사를 자기의 소유로 생각하고 있어요. 족벌경영이지요. 회사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의 소유여야 하는데, 자기 개인의 회사라고 자기 마음대로 하잖아요. 우리도 그래요. 대기업이 그러는데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지요, 뭐.”
“나라가 노동자의 편을 안 들어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홀대해요. 대학 나왔다고 넥타이 메고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만 우대해요. 내가 40년을 넘게 일했는데, 절실히 느낄 때가 많아요.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없으면 어떻게 윗대가리들이 있겠어요.... 그런데도 기술자들을 우습게 본다니까요....”
한전직원이 온 것은 처음에 온다는 시간보다 1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저녁 8시다. 그래도 반가웠다. 화를 낼 수는 없다. 우선 지금이라도 올려 주는 것이 고맙고, 같은 전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다음에 또 봐야하기 때문이다. 나도 잔머리를 굴려 일을 시작하면서 다 끝났다고 빨리 와 달라고 전화를 했었다. 이 사람들은 그런 잔머리보다 한 수 위다. 온다고 한 시간보다 한 시간도 더 늦게 온 것이다. 공공장과 함께 있던 차에서 내려 다가갔다.
“아이고, 어떻게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요. 11시에 작업 다 끝나고 먹으려고요.”
믿거나 말거나다. 어떻게 이 시간까지 저녁을 먹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속아 주어야 한다. 저녁도 못 먹고 일한다고 투덜거리지도 않고, 목소리도 씩씩한 걸 보니까, 굶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가 기다린 한 시간이 저녁식사 시간이었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잘 했다.
LA 교체 한 걸 확인하고 COS 하나 올리는 것은 금방이다. 이제 내 일이 남았다. 수배전실에 가서 위에부터 차례로 올리면 된다.
“ASS 투입.”
전압계를 확인했다. 3상이 모두 380V가 된다.
“ACB 투입,”
ACB 아래 저압 메인에 있는 차단기를 차례로 올렸다. 그리고는 공장으로 들어가 전압을 찍었다. 3상에 모두 380이고, 단상은 220V이 나온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여기는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지하수를 뽑아서 쓰는데, 아침부터 물이 안 나와서 씻지도 못했다는 공장장이 이제 가시라고 손을 흔든다.
“가세요. 수고 하셨어요. 고마워요. 여기는 내가 정리할게요.”
“예, 수고하세요.”
하룻저녁 사람 하나 만나서 인생 하나 또 살았다. 하늘 가운데서 만난 비행기 연기 줄이 만났다가 다시 멀어지기 시작하면 또 끝도 없이 벌어진다. 점검을 하다 보면 눈인사는 하겠지만, 이렇게 사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또 있을까? 그래도 저녁이라 길이 미끄럽다. 공장장이 산 인생처럼 미끄럽다. 내 찻길도 엄청 미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