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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기주 Nov 12. 2023

혹시 제가 P면 탈락하나요?

음침한 이직 준비 중, 면접에서 계속 MBTI를 물어봐요.

최근 여러 가지 이유로 이직을 결심했다. 마케터로 만 2년 넘게 일하면서 마케팅 업무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고 더 늦기 전에 내가 잘하고, 잘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래서 요즘 '음침 이직'을 시도 중이다. 


처음엔 회사 규모가 마음에 안 들었다.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인원 수도 적고 복지도 성에 차지 않아서 내가 이 정도인가? 생각하며 이직을 고민하는 계기가 됐다. 자의식 과잉일 수도... 나는 진짜 그 정도 능력치의 인간일 수도...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고 느낀 게 지금 회사에 입사하기 전 면접 결과를 기다릴 때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동생이 이야기해 줘서 겨우 기억이 났는데, 그때 나는 밤식빵을 뜯어먹으면서 "아 이 회사는 진짜 진짜 가고 싶은데 꼭 붙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단다... 물론 지금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도망치고 싶은 생각만 가득하다.


두 번째는 도태되고 있다고 느껴져서다. 마케터로 일하면서 아직 주니어라 익숙하지 않은데 사수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고, 전 회사보다 (첫 회사라 그런지 계속해서 비교하는 기준이 된다.) 내가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한정적이다. 오퍼레이터 같은 업무만을 계속하면서 이런 식의 경력만 쌓이다간 다음 이직 기회가 있을 때 내가 어떤 퍼포먼스를 했는지 보여주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하는 일이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평소 마케터는 판매하는 제품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일했는데 마음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마음을 잘 잡고 진득하게 일해보고 싶은데 자꾸 마음이 콩밭에 가있다. 뭘 해 먹고살아야 하지? 다들 이런 고민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건가? 


세 번째는 대학원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마케팅인지 고민하게 되는 터닝 포인트를 맞은 것 같다. 사실 최근 마케터라는 직무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SNS 콘텐츠를 기획하고 업로드하는 과정은 그동안 해오던 일이라 익숙했다. 그런데 팔로워가 늘었는데도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도 않고 감흥도 없었다. 스스로 별로라고 느꼈다. 왜 이렇게 책임감이 없지? 대행사에서 리포팅해서 보내주는 수치들을 보고 계획을 다시 수립해야 하는데 숫자를 보는 게 재미가 없다. 그냥 업무 시간, 출퇴근 이동시간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튀어나온다. 조각조각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마케터 경력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계속 마케터로만 지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잡코리아에서 다른 직업이 뭐가 있는지 따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고 계속해서 같은 키워드로만 검색하고 하루에 2-3개씩 의미 없이 지원했다. 그냥 같은 회사를 거리만 차이를 둬서 다니려고 했다. 뻘짓하고 있었다. 




뭐 어쨌든 지금 회사에 더 남아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이직에 확신이 생겨서 음침 이직을 시도 중이다. 꽤 어렵게 취업했기 때문에 나갈 때도 좋게 나가고 싶고 당장 그만두기보다는 할 일을 해나가면서 비빌 언덕을 유지하며 이직을 준비하고 싶다. 회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달갑지 않겠지만.... 내 인생이 더 급하다. 


그래서 며칠 사이 면접을 두 군데 보고 왔다. 재미있는 점은 면접관들이 꽤 진지하게 MBTI를 물어본다는 것이다. 첫 번째 면접본 곳에서는 자신 있게 대답하고 면접관의 MBTI를 여쭤보기도 했다. 

그리고 회사면접에서 MBTI를 물어보는 곳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면접에 갔는데 MBTI 질문은 기본이고 추가로 '스스로 T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질문의 의도가 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이젠 질문의 의도가 궁금하기도 하고 애초에 지원하기 전 알던 정보와 직무가 너무 달라서 떨어질 걸 예감했기 때문에 질문했다. 혹시 제가 MBTI가 P면 떨어지나요? 물었다. 그런 건 아니라고 하는데 다음 면접부터는 거짓말로 J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생각이 든다.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하다 보니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도 면접 자리에서 MBTI가 뭔지 물어봤고, 그동안의 면접에서도 수차례 MBTI 질문이 들어왔던 게 기억났다. 


MBTI를 나도 워낙 좋아해 아이스브레이킹 소재로 많이 쓰고 유형별 특징이 어떤지 꿰고 있지만 회사 직원을 채용하기 위한 면접자리에서 MBTI를 물어본다는 것이 생소하기도 하고... 신기했다. MZ, 요즘애들 하는데 면접관들이 더 MZ 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를 MBTI로 판단하겠다는 건가, 참고만 하겠다는 건가, 애초에 이력서랑 자기소개서, 직무 관련 질문과 대답 말고 MBTI가 왜 채용 과정에서 필요한지 의문이 들었다. 제가 P면 충동적이고 즉흥적이어서 업무를 잘 못할 것 같은 성향이라 채용 고려 요소가 될까요? 


왠지 다음 면접에는 J라고 거짓말해야 할 것 같은 나쁜 생각이 어쩔 수 없이 자꾸자꾸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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