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산책: 수필
사바골과 실천하는 효(孝) 사상
경상북도 영천과 포항 기계면, 안강 일대
를 감싸는 깊은 골짜기. 그곳엔 ‘사바골’
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1969
년부터 1973년까지, 총각 시절 나는 군
관련 업무로 이 지역 읍·면소재지를 오가며
근무 했다.
그러나 교통은 불편하고 통근은 고역이
었다.결국 결심했다.차라리 마을의 촌집에
방을 하나 얻어 1년을 지내자고.그러다
인연이 된 집이 돌쇠와 억순이네였다.
호롱불 밝힌 흙벽 방, 아궁이에 군불이
돌아 포근한 그 방엔 할아버지와 할머니,
돌쇠네 부부, 그리고 자식들 그렇게다복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그 마을엔 열 가구
남짓 흩어져 있었고, 대부분 초가 아니면
슬레이트 지붕. 전기는 들어 왔지만, 이
골짜기 만은 여전히 호롱불의 시대였다.
밤이면 마중 나가는 등불 하나가 귀한 빛
이었고, 그 등불은 장에 다녀오는 부모를,
늦게 귀가하는 자식을 맞이하는 등불
이기도 했다. 사바골 사람들은 왕복 80리
를 걸어 장을 다녔다.
돈이란 곡식이나 가축을 팔아 얻은 것뿐.
보리, 콩,깨, 말린 고추, 고구마 등을 이고
나가 5일장 난장에서 하루 종일 떨이
기다리다 늦은 귀가가 되기 일쑤였다.
돌아올 땐 꽁치 스무 마리를 새끼줄에
꿰어 들고 아홉 고개를 넘었다. 해가 뉘엿
뉘엿 지면, 마을 어귀에서 등불을 든 가족
들 이 고개 너머 아버지를 맞으러 나간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세 고개쯤 넘었을까, 바람이
차 고 어둠은 짙었으며 어디선가 노루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였다.
하얀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천천히 걸어
오는 아버지 손에는비어 있는 새끼 줄
뿐이 었다.“이거, 손자 돌쇠랑 억순이
주라고, 꽁치 좀 구워 먹여라.”하지만
새끼줄엔 꽁치 한 마리도 없었다.
그래도 아들은 말없이 대답했다.
“예, 아버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모셔두고는, 다시 어두운 길을
따라 고개 너머 꽁치를 찾아 나섰다.
결국 찾은 건 술에 절은 꽁치 세 마리.
그나마 그중 한 마리를 돌쇠와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 선연하다.
또 한 번의 기억.
시골 산골에 처음 들어선 아이스케이크
장수. 낡은 손수레 에 나무통을 맨 그는
못쓰는 양푼, 고무신, 헌책 따위와 아이스
케이크를 바꿔 주었다. 돌쇠 할머니는
손자 먹이려 깨진 놋쇠요강을 내주고
아이스 케이크 몇 개와 잔돈을 얻었다.
그걸 큰 가마솥 안에 숨겨두었다
학교 마치고 돌아온 돌쇠를 데려가 솥뚜껑
을 여니, 남은 건 녹아버린 물과 나무
꼬챙이뿐. 할머니는 분개해 밭일하는
며느리를 찾아가 머리채를 잡고 소리쳤다.
“니 새끼 주려고 넣어놨더니 다 빨아먹고
꼬챙이만 놔뒀냐, 이 더러운 년아!”
며느리는 울면서 고개를 숙였다.“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머님, 용서해 주십시오…”
그날도 나는 효(孝)의 마음을 목격했다.
시어머니의 억지를
참아내는 며느리의 인내.
아버지의 취기를 마음으로
받아내던 아들의 공경.
그 깊고 험한 골짜기에서
배운 진짜 삶의 무게였다.
세월이 흘러, 돌쇠는 효자 마을의 이장이
되었다고 한다.대통령상을 받았고, 부모
를 모시며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다
효란 말로 정해질 수 있는 덕목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날 아버지를 마중 나가던 등불,
솥뚜껑을 열던 순간의 며느리의 침묵,
그 모든 장면들이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부모불효 사후회(父母不孝 死後悔).
이 말처럼,그날의 꺼지지 않는 불씨를
심지 끝에 살려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조용히
그 불빛을 다시 꺼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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