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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Nov 11. 2022

<용서받지 못한 자>

잊혀진 피해자들을 위해

익숙한 것에 대한 특별한 인지는 어렵다. 어떤 것이 인식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이전과 다른 상태일 때 일어난다. 우리는 매 순간 숨을 쉬지만 매 순간 숨 쉰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리고 한 특별한 순간, 예를 들어 이 문장을 읽을 때야 내 들숨과 날숨을 확인한다. 익숙함을 특별함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거울 치료’가 효과적이다. 나의 늘 그래 왔던 행동을 누군가로부터 고스란히 돌려받는다면 그간의 내 행동에 반성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이상에서 영화의 가치 혹은 역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는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고, 관객은 그 거울 속의 이미지를 통해 익숙한 풍경을 새롭게 인식한다. 다른 예술매체에 비해 영화의 고유성은 여기에 있다. 시청각적 자극을 넘어 우리가 공유하는 경험 체계에 대한 모사는 오직 영화만이 가장 유리하게 성취할 수 있는 지점이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는 시도만으로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대부분이 다녀온 군대라는 특수 조직을 내부자의 시선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능 <진짜 사나이>와 같은 거짓되고 왜곡된 모습이 아닌 정말 진짜 리얼 군대를 보여준다. 사실 이 영화는 ‘국가 안보’라는 거창한 간판 뒤에 숨겨진 병영문화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시도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아마 미필자들도 군대에서 벌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 관습과 행동들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흥미로울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벌어지는, 그리고 실제로도 벌어졌던 비극적 사건의 씁쓸함은 뒤로하고 말이다. 이른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이 여기에 적용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에서 가까이 봐야 보이는 비극의 전모에 대해 간단히 적어보고자 한다.


"피살될 줄 알어."라고 말하는 태정(하정우)의 장난어린 경고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점에서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는지를 함의한다.


많은 이들이 군대를 대한민국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맞는 말이다. 비합리성과 광기 어린 폭력이 전체의 보위를 위해 정당화되는 점이 바로 그러하다. 병장인 태정(하정우)은 모두가 취침하는 밤에 상병 하나(대석, 한수현)를 불러서 빠따를 친다. 그리고는 다음부터 잘하라고 담배 하나를 건네주는데, 얻어맞은 그 상병은 구겨진 표정 없이 웃는 얼굴로 담배를 받아 핀다. 빠따를 얻어맞았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의문을 갖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바로 군대이다. 태정이라는 인물은 군대 내부자의 전형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내재화된 폭력에 별 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 너네들 잘 되라고(편하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정보다 더 악질적인 인물도 많은데, 왜 굳이 그가 군대 내부자를 대표하는지에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 이유는 영화를 구성하는 두 플롯 모두에 태정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두 플롯을 넘나드는 태정은 군대와 사회를 매개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두 가지의 플롯이 교차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첫 번째 플롯은 승영(서장원)이 자대로 전입한 이후부터의 이야기를, 두 번째 플롯은 자대에서 탈영한 승영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첫 번째 플롯은 군대에 대응하고, 두 번째 플롯은 사회에 대응한다. 그리고 두 플롯 모두 비극으로 끝나는데, 전자의 비극이 후자의 비극을 결정한다. 결국 영화는 군대에서의 비극이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 첫 번째 플롯부터 살펴보자. 승영은 군대의 부조리한 체계에 저항하려고 한다. 그러나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그러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영화의 짓궂은 설정은 중학교 동창인 태정(하정우)이 승영의 부대에 병장(분대장)으로 있다는 것이다. 남들이 고깝게 보는 승영을 태정이 감싸고 도니 승영을 바라보는 시선이 안 좋을 수밖에 없다. 군필자라면 공감하겠지만, 승영은 태정 덕분에 상당히 편한 군생활을 하는 것이다. 즉, 부조리한 병영 문화에 저항하는 승영은 정작 자신이 그 부조리한 체계의 수혜자인 것이다. 비극의 태동은 여기서 시작되나 그 전개는 태정이 전역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빽이 없어진 승영은 군대라는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병영 문화를 바로잡겠다는 초기 다짐을 포기하고, 기존 질서에 편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군대 특유의 배제 논리에 의해 맞후임인 지훈(윤종빈)은 버려진다. 결국 군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지훈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승영은 지훈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못한 채 탈영을 하게 된다.


첫 번째 비극의 핵심은 피해자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가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플롯에서 병장인 태정은 다소 모범적으로 군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이나, 두 번째 플롯에서 전역 이후의 태정은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두 플롯에서 나타나는 태정의 이미지와 태도의 상반은 아마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근접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은 군대를 다녀와야 철이 든다는 속설이 얼마나 실없는 이야기임을 말해준다. 두 번째 플롯은 태정에게 보다 초점이 맞추어진다. 두 번째 플롯이 사회를, 그러니까 전역 이후의 세상에 대응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왜 태정이 이때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군필자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정서는 지난 군생활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허탈감이다. 이 허탈감은 망각에 기인한다. 그 당시에는 정말로 지옥과도 같았지만 전역을 하는 그 순간 급격하게 잊혀지기 때문이다. 잊혀진다는 것은 책임을 질 이유를 못 느낀다는 것과도 같다. 따라서 태정의 무책임하고 무심한 태도는 군대를 다녀온 우리 한국 남성들을 대표한다. 그리고 이 일반 전역자들이 현 사회의 구성원임을 이해한다면,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노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해진다. 여하튼 태정에게 군대는 이제 남 일이며 단지 술자리 안주거리일 뿐이다. 그는 지난날들에 더 이상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승영은 단지 휴가 정도 나온 군바리일 뿐이며 다소 귀찮을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절망감에 사로잡힌 승영은 태정에게 ‘대리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사건의 관계자가 아닌 태정에게 괜찮을 것이라고 말해달라는 승영의 요구는 죄책감을 떨쳐내기 위한 최소한의 책임지려는 행동이다. 군생활을 같이 공유한 친구에게 찾아가 최소한의 위안을 받고자 하였으나, 이미 전역한 태정은 이러한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잊었으니 굳이 책임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두 번째 플롯의 마지막은 또 다른 비극, 승영의 자살로 마무리된다.


두 번째 비극의 시사점은 우리 사회에 용서받지 못한 자가 버젓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화 말미에 태정은 또 다른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된다. 그는 분명 승영의 자살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친 이후 곧장 잊어버린다. 여자 친구와 대게를 뜯어먹는 마지막 장면은 태정의 무심함에서 더 나아가 잊혀진 폭력의 희생자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보여준다. 군대에서 행해진 수많은 크고 작은 폭력들은 전역과 동시에 잊혀진다. 전역 이전에는 “군대는 원래 그래~”라는 논리가 모든 부조리를 뒤덮고, 전역 이후에는 추억으로 둔갑한다. 이렇게 우리는 잊어버리고 술자리에서나 단편적인 기억을 재조립하여 술안주로 삼는다. 때때로 “그래도 군대 있을 때가 좋았지…”라며 기억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여기에 폭력의 피해자가 들어설 공간은 없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연예인의 학폭 논란은 순전히 가해자 입장에서 ‘논란’ 정도인 것이다. “아니, 왜 다 지난 일들을 들추어내는가? 당시에는 내가 철이 없었으나 지금은 착하게 잘 살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순전히 가해자들의 입장이다. 영화의 시간적 순서가 첫 번째 플롯에서 두 번째 플롯으로 진행이 되지만, 지훈과 승영에게 두 번째 플롯은 없다. 이들의 시간은 전역 이전까지로 멈추어 있다. 피해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폭력에 둔감한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무책임한 저들(우리들)에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와 함께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용서받지 못함’이라는 낙인을 찍으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폭력 관계의 주객만을 이해한다. 그러니까 폭력이라는 사실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가해자=주체, 피해자=객체라는 도식을 받아들인다. 또 그러하기에, “증거 있어?”라는 사실에 집착하는 태도를 용인한다. 하지만 폭력의 문제에서 최소한 요구되는 사항은 도덕적 책임을 지는 자세이어야만 한다. 두 플롯을 통해 영화는 이를 강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에서 한 번도 노골화되지 않은 ‘용서’라는 주제는 영화적 소재이기보다는 영화가 내세우는 어떤 윤리관에 가깝다. ‘폭력’이라는 사태가 아닌 ‘용서’라는 도덕적 책임의 관점에서 주객은 전복된다.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라는 문장을 보자. 용서라는 관계에서 피해자(주어)는 가해자(목적어)에 앞서는 관계가 된다. 따라서 이 영화는 ‘폭력을 행한 자’가 아닌 ‘용서받지 못한 자’로의 전환을 꾀해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잊혀진 여러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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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문: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 역시 당당하지 못하다. 나는 군대에서 가해자였다. 나는 군대에 있는 동안 군대의 논리를 철저히 수용했다. 내가 저지른 폭력의 세기와 피해자들의 상처가 크건 작건 간에, 잘못은 잘못이다. 여기에 대한 책임으로 나는 기꺼이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낙인을 받아들이겠다. 그리고 평생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며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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