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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Dec 05. 2022

<올빼미>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되는 기적

인과율에 익숙한 고대인의 사고방식은 때론 지독히 잔인하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그녀의 가족이나 가문이,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이유로 벌을 받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는 이러한 생각을 부정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자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일으킨다 (요한복음 9:1~5). 이 이야기의 주제는 단지 예수의 자애로움이 아니다. 선천적 장애는 부모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며 단지 불행한 일일 뿐이라는 눈앞의 진실 폭로에 핵심이 있는 것이다. 이후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9:39).”


보지 못한다고 해서 보아서는 안 될 일을 눈앞에서 해선 안 된다. 이 영화의 소소한 교훈.


경수(류준열)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받는 차별과 역경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같은 값을 지불하고서도 고기를 살짝 덜어내는 상인의 횡포가 그러하고,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경수가 그러하다. 때는 조선시대. 유감스럽게도 예수는 그 시대와 장소에 있지 않다. 하지만 경수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스스로 갈고닦은 실력을 인정받아 궁궐 내의원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인조 치세. 국제정세의 판단 실수와 명분뿐인 도덕외교 정책은 두 차례의 호란을 일으켰다. 민심은 동요했고, 정치는 어지러웠다. 그러나 왕(인조, 류해진)은 콤플렉스에 빠져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했다. 이러던 와중에 소현세자(김성철)는 귀국한다.


소현세자는 뒤늦게 눈을 뜬 사람이었다. 청에 머무르며 그는 국제정세를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힌 자신의 조국도 보았다. 그는 인조 앞에서 지구본을 보이며 손가락으로 조선의 위치를, 그 작은 크기의 나라를 가리킨다. 하지만 인조는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 청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오랑캐일 뿐이다.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의 나라는 여전히 어두운 밤중에 있다. 영화는 한 마리의 올빼미가 목격하는 것을 관객에게 다시 보여주는 방식으로 인조실록 몇 자 정도로 축약된 그날의 진실을 다시 쓴다. 깊은 밤 중에 경수가 소현세자에게 날아들어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빛과 어둠의 대조. 조선의 흔들리는 운명. 유해진의 흥미로운 악역 연기.


이쯤에서 영화적 허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꽤 여러 아쉬운 지점이 눈에 띄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점은 경수가 소현세자에게 가지는 애착 혹은 존경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해석은 동질감이다. 경수는 궁궐의 밤을, 소현세자는 조선의 밤을 날아다니는 올빼미다. 둘 다 진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어떤 연결의 끈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동질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경수는 눈앞에서 소현세자가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본다. 그리고 경수는 더 큰 진실을 보게 된다. 모두가 왕이라 받들었던 자가 자기 자식까지도 죽이는 잔인함을. 그러나 그는 살기 위해 보지 못했다고 한다. 본래 보지 못하는 경수에게 위정자들의 일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영화 상에서도 너무 쉽게 죽어 아쉬운 소현세자.


궁궐을 도망치는 경수의 마음을 바꾼 것은 다시 그 동질감이었다. 위험에 처한 소현세자의 원손(이주원)은 경수로 하여금 형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는 어린 동생(김도원)을 떠올리게 했다. 다시 돌아온 올빼미는 폭로자가 되기로 한다. 예수가 한 말을 실천하려는 듯 그는 보지 못하는 자들도 보게 하려 한다. 경수는 소현세자를 옹립하려던 최대감(조성하)을 찾아간다. 그리고 인조의 오른손까지 마비시키면서 진실을 드러내어 정의를 밝히고자 한다. 하지만 영화의 비극은 경수가 본 진실이 여전히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소현세자의 죽음은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소현세자는 아침을 향해 날아가던 중 깊이 드리운 위정자들의 장막에 운 없이 박아 죽어버린 것뿐이다. 


이렇게 낮이 되고 경수는 다시 앞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수와 다른 보지 못하는 자들은 이제 진실을, 권력의 잔혹함과 조선의 병폐를 본다. 반면에 모든 진실을 본다고 생각한 인조는 조선에 닥쳐올 더 큰 암흑을 보지 못했다. 그가 제대로 본 것은 4년 후 자신을 죽이려고 온 경수의 얼굴뿐이다. 이 미묘한 역전 상황에서 인조는 죽는다. 병명은 학질. 소현세자와 동일한 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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